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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사는 이야기

겨울로 가는 아침

by 여왕벌. 2007. 12. 1.
 

모처럼 몇 가지 일을 해결할 요량으로 엄니와 함께 할 시간을 비워 두었다. 

오랜만에 마당에 나가니  아침 풍경이 낯설기 조차 하다.

 

아랫채 처마 옆 푸석거리는 화분이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더해 준다. 마당 한 켠에 가는잎꽃향유가 하얗게 박제된 모습으로 보라색 가을을 전설로만 추억하고, 가는잎산들깨는 가을 볕에 아직 미련 남아 빈 깍정이에 남은 가난한 허브 향으로 가슴앓이 하고 있다.


꽃밭이랄 것도 없는 잡초들 무성했던 마당에는 그 화려했던 계절의 흔적만 남아서 빗질하지 않은 여인의 머리처럼 어설프다. 그 사이 용담은 꽃봉오리를 단 채로 말라 있고, 민백미는 벌써 씨앗을 멀리 날려 버리고 박주가리 열매처럼 요람 껍질만 남아 있다. 뒤늦게 어수리가 푸른 이파리 손바닥처럼 펼치고 애처롭게 서리 맞으며 보는 이의 마음을 시리게 한다.


제주 여행에서 따라 온 말똥비름도 푸르딩딩 얼어 있고, 어설픈 솜씨로 얹어 놓은 몇 개의 기왓장 분도 달이 넘도록 관심 가져주지 않은 주인 덕분에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나마 마삭줄은 빨간 잎을 매달고 아직 건재함을 알리고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물바가지를 들고 마당가에 서성거린다. 무에 그리 바빴었는지 가을이 다 가도록 꽃밭에 눈 길 보냈던 기억이 가물하다.


벌써 봄맞이꽃 월동 싹이 빨갛게 동면에 들어가고 있고, 개불알풀 어린 싹도 하얗게 서리를 덮어 쓰고 있다. 수도 가에 제법 어우러져 있던 개불알풀 싹은 부지런하신 엄니 손끝에 거의 뽑혀버리고 어린 몇 포기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래도 내년 봄에 푸른 꽃송이 들여다 볼 수 있다 생각하니 다행스럽다.


싹이 새로 돋을 리야 없겠지만 겨울 가뭄은 면해야 하겠기에 말라서 푸석이는 화분에 조심스레 물을 부어 준다. 마른 목축이듯이 금방 잦아드는 물기를 보니 어지간히도 속이 탔나 보다. 아무 것도 없는 빈 분에도 공양하듯이 한 모금씩 물을 부어준다, 어느 씨앗이 거기 떨어져 새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을는지 모르니까.


마루 구석에 있던 모종삽을 찾아 들고 금낭화가 심겨져 있는 쪽으로 가 본다. 꽃밭의 흙을 제끼니 아직 땅이 얼지 않아서 쉽게 뒤집어진다. 금방 목욕하고 웬 흙장난이냐고 핀잔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듣고, 아직 파랗게 살아 있는 종지나물을 뽑는다. 모종삽 날 끝에 둥굴레 뿌리인지, 마 뿌리인지 걸리는 느낌이 조심스러워서 제대로 삽질을 하기도 어렵다.


제비꽃 종류를 잘못 들여 놓았다가는 감당을 못할 정도로 퍼져서 도배를 해 버린다. 종지나물은 올 봄 그렇게 캐내었는데도 아직 한참 뽑아야 할 정도로 남아 있다. 다시는 들여 놓지 않을 거라고 해 보지만 지난 여름에 또 알록제비 동그란 잎이 예뻐서 두 포기 얻어들이지 않았던가. 아무튼 꽃 상사병은 고칠 약도 없다.

뿌리줄기로 퍼지는 녀석들도 지 멋대로 퍼져나가서 감당이 안 된다. 벌써 도배할 기미를 보이고 있는 꽃범의꼬리도 조만간 처리를 해야겠다.


담 섶 바닥에는 참마 살눈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다. 내년에는 꽃밭이 마밭으로 변하는 건 아닐런지.... 하기사 꽃밭이랄 것도 없지만.


모처럼 한가한 휴일 아침, 아쉬운 대로 가을걷이를 하였다. 몇 시간의 소일 덕분에 가을의 배설물로 남겨진 풍선덩굴, 가는잎꽃향유, 가는잎산들깨 종자를 챙겼다. 내일은 씨앗을 어디에 뿌려줄지 둑방을 어정거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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