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펫을 깔며
교실 가운데 카펫을 깔았다. 가로 4m, 세로가 3m인 연두색에 어두운 녹색이 살짝 섞여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책은 5~6명씩 모둠을 짜서 카펫 주변에 빙 둘러 배치하고, 북편 창쪽에는 4개의 코너를 마련하여 칼라 매트를 깔았다. 교실의 위치가 건물의 서편 가장자리에 있는 덕분에 복도 넓이 만큼의 공간이 확보되어 여유가 충분하여 다행이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매트 위나 카펫에 소복이 모여서 공기놀이에 여념이 없다. 방과 후의 시간에도 책상보다는 카펫 위의 두레상에서 숙제를 하거나 코너 구석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설치기 좋아 하는 녀석들은 뒤엉켜 장난을 치느라고 꾀나 소란스럽다. 꼭 유치원 놀이방 같아서 신이 난단다.
진공청소기로 가끔씩 카펫의 먼지를 제거해 주어도 아이들은 잦은 움직임에 금방 고운 솜먼지가 앉는다. 위생적으로 다소 걱정스럽지만 녀석들에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
점심 식사 후, 공기놀이에 정신이 없는 아이들 틈에 슬그머니 끼어 앉으니 손뼉을 치며 까르르 자지러진다.
아이들이 "샘터"라고 명명한 카펫 위에 푹 무질러 앉아 색색의 플라스틱 공기를 던지고 받으니 신기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탄성이 연발이다. 플라스틱의 가벼운 느낌이 헛손질만 하는 듯 했지만 새삼스럽게 유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어린 시절 내 또래의 여자 아이들은 둘만 모이면 공기놀이나 고무줄 놀이를 하였다. 주머니나 필통 속에는 누구든지 다섯 알의 공기돌이 달그락 거렸다. 그 중에서도 차돌 공기알 다섯 개가 손안에 편하게 잡힐 정도로 동글동글 갈아 다듬은 것이 가장 인기가 있으며 모두들 그런 공기 돌을 가지고 싶어 안달을 하였다.
그래서 하교 길 건천에서 예쁘고 하얀 차돌을 찾느라고 어정거리다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옆구리에 끼고 만족한 기분으로 돌아오던 기억이 많다. 공기 돌을 주머니 속에서 조물거리고만 있어도 흐뭇하기만 하였다.
지금의 공기알은 조형 틀에서 찍어낸 육각 기둥 모양의 플라스틱에 색깔을 넣어서 산뜻한 맛은 있지만 너무 가벼워서 손에 잡혀지는 무게감이 없고 몰개성적이다.
공기 돌의 모양을 보면 대강 그 아이의 성격이 드러난다.
알이 작으면 일정한 크기의 매끈하게 다듬어진 차돌 공기 돌은 영리하고 깔금한 반면 냉정하여 차가운 면이 있고, 굵으면서도 손질이 잘 된 것은 너그럽고 인정이 있다. 울퉁불퉁하여 크기나 모양이 제 멋대로인 것은 태평스럽고 느리며 운동 신경 또한 둔하다고 보면 된다.
공기알 다섯 개를 손등 위에 올려놓았다가 살짝 위로 던져서 손으로 엎어 잡을 때의 "착"하는 소리는 매우 상쾌하다. 다섯 개를 동시에 잡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두게 던져 올려서 "차작"하고 2단으로 잡는 것은 2배의 점수를 준다. 2단으로 꺾어 잡는 것은 난이도가 높아서 그것을 잘 하는 친구를 무척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공기놀이는 장소 불문이다.
다섯 알을 바닥에 놓고 엉덩이만 불이면 어디서든지 놀이가 시작된다. 길바닥에도 퍼질러 앉아 슥슥 땅바닥만 고르면 된다. 손톱 밑에 고운 흙가루가 새까맣게 끼여 손톱 끝이 뻐근해도 끝이 날 줄 모른다. 공중에 던져 올린 알이 떨어지기 전에 멀리 떨어진 두 개의 알을 콕콕 찍어 잡았을 때의 기분은 짜릿한 묘미가 있다.
공기놀이는 땅바닥에서 뿐만 아니라 매끄러운 장판이나, 마루, 멍석 위에서도 자주하였다. 카펫의 도톨도톨함이나 멍석의 거칠거칠한 촉감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짚으로 촘촘하게 짜여진 멍석의 짜임 무늬를 보면 땋아 내린 갈래 머리가 연상된다. 멍석의 무늬를 보면 늘 머리를 곱게 땋아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바로 보거나 거꾸로 보거나 똑같이 땋아서 어느 쪽으로 짰을까 궁금해서 요리 보고 조리 보곤 했다.
더운 여름 날 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은 식구들의 저녁 식사 장소나 안방이 되기도 한다. 윗도리를 벗고 누워 콩기름 먹은 부채를 부치면, 더욱 밤 쩍쩍 달라붙는 장판보다 멍석이 한결 시원하다. 등이 가려울 때 슬쩍 몇 번만 스쳐 움직여도 어머니의 거친 손맛보다 더 후련하다. 멍석 위에 누워 있으면 매운 고추 냄새가 솔솔 날 때도 있다. 멍석 틈새에는 고추씨나 참깨, 콩알이 더러 끼여 있어서 멍석 위에 널어놓았던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얼마 전 도락산 아래의 산장에서 차 한잔을 마시면 산행 후의 휴식을 취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물건들을 다락방이 빼곡하도록 전시해 두고 있었다. 그 2층 다락방에 깔려 있던 멍석 위에 앉아 얼마나 반가워했던지.....사라져 가고 있는 평범한 옛것들을 관조하며 멍석 위에서 차를 마시니 그 맛 또한 일품이었다.
"야야, 니 먼지 구데이에서 뭐하노?"
"멍석이 있는 것 같던데 어디 있니껴?"
산행 후 멍석의 향수를 잊지 못해서 헛간을 뒤지고 있는 내게 어머니는 쓸데 없는 짓을 한다고 타박이셨다.
둘둘 말려 있는 멍석이 먼지를 쓰고 있긴 한데 굵은 나무 기둥과 사다리, 지게에 눌려 있어서 빼낼 엄두가 안 났다. 멍석의 길이가 3m 정도나 되어서 혼자서 들 수도 없었지만.
"그 눔의 멍석에 쥐새끼가 지 안방을 꾸며 놔서 못쓴다."
그래도 마당에 펴 보고 싶은 마음에 꿈쩍도 않는 나무 기둥을 툭툭 차다가 멍석 끝만 만지작거리고 아쉬운 맘을 접고 말았다. 아직도 헛간에 멍석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멍석은 전천후 비닐 천막이 보급되면서 헛간 구석으로 밀려나 생쥐의 안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 멍석이나마 보관하고 있는 집도 별로 없다. 비닐 천막은 크기도 입맛대로 선택할 수 있고, 물에 젖을 염려가 없으며, 값 또한 저렴하니 너도 나도 선호할 수밖에.
교실에도 카펫이 깔리고 그 위에서 플라스틱 공기알을 던지며 놀고 있으니 그 편리함을 고마워해야 하겠지만 서운한 맘은 감출 수가 없다. 이 아이들이 맨흙 바닥에서의 묵직한 공기돌의 정겨움을 어찌 알 수 있으며 멍석의 시원한 등맛을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즉석 쌀밥, 즉석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의 편리함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차돌 공기돌과 멍석은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기만 할 것이다.
편리함은 좋겠다만 옛것이 자꾸만 사라지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나는 아직도 유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고향 집에 살고 있는 덕분에 두 줄로 구멍이 나 있는 가마니틀도 가끔 볼 수 있고, 아래채에 걸려 있는 소 여물통도 볼 수 있으니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동생들이 오면 쥐가 더 쏠기 전에 멍석을 꺼내어 바람이나 쐬어 주도록 해야겠다.
199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