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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사는 이야기

선생님 종소리가 나요.

by 여왕벌. 1999. 9. 23.
 


선생님 종소리가 나요


남명자


"야! 정말 종소리가 난다! 선생님 종소리가 나요."


아까부터 더덕 화분이 놓여 있는 창턱 위에 올라가서 더덕 꽃을 만지작거리던 녀석은 큰 발견이나 한 듯 소란이다.


아이들에게 생명의 신비함과 변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려고 더덕 꽃이 피면 예쁜 종소리가 날거라고 얘기했더니, 호기심 많은 녀석이 오늘 더덕 꽃을 손끝으로 튕겨보고는 '통통' 하는 작은 울림을 들은 모양이었다.


우리 교실 창가에는 목화, 더덕, 꽃호박, 가지, 땅콩, 샛깃유홍초, 나팔꽃들이 꽃이며 열매를 달고 있어서 작은 밭으로 녹색지대를 이루고 있다. 물을 줄 때마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잦아지는 손길에 따라 잘 자라주는 것이 참 기특하다.


길다란 사각형의 화분에는 텃밭에서 옮겨 심은 두어 해 묵은 더덕이 자라고 있다. 행여 진딧물이나 응애가 끼일 새라 분무기로 자주 약을 뿌려주었더니 덩굴이 풍성하게 어우러지고 정작 잎보다 더 많은 은초롱 모양의 꽃을 매달았다. 아이들은 아침마다 몰려와서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종처럼 생긴 더덕 꽃이 얼마나 많이 피었는지 세어보느라고 소란들이었다. 나도 가끔 머리도 식힐 겸 한참을 창턱에 올라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부풀어올라 곧 터지려는 봉오리를 '뽁' 소리가 나게 터뜨리는 재미는 제법 쏠쏠하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고 지금도 시골에 살고 있는 탓에 심고 가꾸는 것을 좋아한다. 들길에 피어 있는 풀꽃이나 나무에 대한 관심도 남달리 많은 것 같다.


봄,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들이나 산에는 야생화가 지천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예쁜 각양각색을 꽃을 음미하면서 산행을 하다보면 바쁘고 지친 심신을 잊고 자연의 싱싱함에 푹 파묻힐 수 있어서 좋다.


야생화라고 순박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금낭화, 금강초롱, 얼레지 같은 꽃은 이름도 예쁘거니와 꽃의 모양과 색깔도 예뻐서 깔끔하고 아름다운 숙녀의 자태를 연상시킨다. 길다란 꽃자루에 하얀 조롱꽃을 수없이 매단 때죽나무와 쪽동백나무 밑을 지나칠 때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무가 온통 꽃덩어리라서 멀리서 보면 커다란 솜사탕 같다. 어찌나 귀여운지 꼭 안고 입맞추어 주고 싶다.


얕은 계곡의 물가에는 손가락을 펼친 듯한 잎을 가진 으름 덩굴이 연분홍의 두툼한 3장의 꽃잎을 벌리고 있다. 어느 해인가 봉정사 아래의 개울가에서 으름 열매를 따 가지고 온 적이 있는데 작은 바나나 크기 만한 열매는 참으로 개성있게 생겼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부인목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던가.


몇 해 전 7월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써늘한 바람이 부는 태백산에 올랐다. 잘 다니지 않는 등산로를 따라 능선으로 오르던 우리는 몇 아름이나 되는 우람한 주목 군락의 위용에 놀라서 가히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또한 등산로 양쪽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주황색의 동자꽃 무리는 벅찬 감동으로 땅바닥에 털퍼덕 주저앉게 하였다.


"아이고! 이뻐라. 난 여기서 살란다."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코스모스처럼 생긴 동자꽃 한 송이는 평범한 것이었지만 주목과 함께 융단처럼 깔려 있는 동자꽃의 모습은 정말 황홀하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교실의 화분을 함께 관리하기 위하여 기린동산 소나무 밑에 모은다. 작년 여름방학 무렵 S선생님이 자주빛 닭 모이주머니처럼 생긴 꽃이 핀 작은 화분을 들고 소나무 밑으로 오셨다. 먼지를 털고 있는 선생님들을 둘러보시더니 이름이 뭔지 알아맞히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야생화를 화훼용으로 재배한 것으로 복주머니꽃 혹은 개불란이라고 하는 것인데 모양이 요상하여 개불알꽃이란 이름으로도 불리는 것이었다.


"고놈 참 특이하구먼."


"꽃이 큰데 이름이 뭐지?"


모두들 고개만 갸웃거리고 이름을 모르는 것이었다. 아무도 알아맞히지 못하자 나는 대뜸


"개불알꽃."


하고 씩씩하게(?) 말하였다. S선생님은 나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꽃 이름에 의외라는 듯 놀랐고 다른 선생님들은 요상스런 이름에 폭소를 터뜨렸다.


5월말의 소백산은 철쭉이 한창이다. 비로봉 턱 밑의 샘터 부근에는 붉은병꽃나무도 무더기를 이루고 철쭉의 인기를 시샘한다. 이 병꽃나무가 부속초등학교 진입로의 언덕에 심겨져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 참 신기해 했었다. 늘 자동차로만 오르내리던 터라 그 꽃나무가 심겨져 있는 것을 올 봄에서야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시청 민원실 뒤쪽의 언덕은 꽤나 높은데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높은 언덕에 병꽃나무를 심어 놓은 것이 못내 애석하였다.


2년 전 4월, 해드랜턴으로 새벽길을 밝히며 영암 월출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굽어본 암릉은 가히 절경이었다. 그런데 정상 부근의 여러 군데의 나무를 커다랗고 하얀 나비 떼가 뒤덮고 있는 게 아닌가. 산누에 나방인가 하며 가까이 가보니 그것은 네 개의 잎으로 이루어진 하얀색의 큰 꽃으로 처음 보는 꽃이었다. 산행에서 돌아와서 찾아본 즉 산딸나무라고 하는 것이었다. 열매가 딸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월출산의 하얀 나비떼 꽃은 그 후 다른 산에서도 가끔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백두산은 식물의 보고라고 할만큼 각양의 식물들이 많아서 식물 탐사를 위한 학술 단체의 답사가 더러 있었던 걸로 안다. 그들이 탐사하면서 펴낸 야생화 책을 나도 한 권 가지고 있지만, 장백폭포를 오른쪽 아래로 끼고서 백두산의 천지를 오르다 만난 두메양귀비 꽃잎의 노란 하늘거림을 잊을 수가 없다.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돌과 물위에 뜨는 부석을 주워 베낭 주머니에 넣고, 두어 송이의 양귀비꽃을 따서 수첩에 끼워 가지고 왔다. 검고 흰 두 덩이의 돌은 서장 안에 모셔져 있는데 양귀비 꽃잎은 어디에 두었는지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봄  소풍 때 우리 반 녀석들은 '애기똥풀'을 찾아다니느라고 야단이 났다. 슬기로운생활 수업 시간에 교과서에 실린 애기똥풀을 가르쳐 주었더니 그걸 확인하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이 없다. 수박 잎처럼 생긴 잎을 뜯어 들고 잎자루에서 나오는 애기똥 같은 노란 물을 손등이며 얼굴에 마구 그려대면서 즐거워하였다. 고운사 진입로에는 풀꽃들이 많기도 했다.


몸에 하얀 솜털을 세우고 노란 꽃을 한창 피우고 있는 애기똥풀은 길섶에 지천이었고 냉이며 제비꽃, 쑥, 산괴불주머니, 양지꽃, 으름 덩굴, 칡, 별꽃, 괭이눈, 둥굴레, 붓꽃에 현호색까지.


아이들은 보이는 대로 풀을 뜯어 와서는 이름이 뭐냐고 성화였다. 풀꽃을 한웅큼 쥐고 수첩에 열심히 이름을 적어대는 아이들을 보니 자연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산행이나 야외에 나가서 이름을 아는 야생화나 나무를 만나면 무척 반갑다. 새롭게 본 꽃이나 나무는 도감을 뒤져서 꼭 확인해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한가한 때 식물도감을 뒤적이다 보면 재미있는 이름도 여러 가지이다. 며느리밥풀, 며느리밑씻개, 기생초, 쥐오줌풀, 도둑놈의 갈고리......너만 꽃이냐 나도 꽃이지 하는 나도냉이, 나도송이풀, 나도옥잠화, 나도제비난,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 희한하고 순진한 이름에 저절로 웃음이 돈다.


돌봐주지 않아도 한결같이 같은 모습으로 피어나는 들꽃들의 생명력이 대견스럽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피었다가 지는 들꽃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순수해지고 맑아 온다. 그 순간 만큼은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행복감으로 가득해 진다.


우리 아이들도 더덕 꽃의 종소리에 귀 기울이고 애기똥풀의 노란 꽃물에 신기해 하던 그 순수함과 사랑스러운 모습을 언제까지 간직하였으면 좋겠다.



1998. 명륜 동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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