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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사는 이야기

개발 유감

by 여왕벌. 1995. 11. 22.
 

개발 유감



 요즈음 아침마다 출근길이면 붉은 산과 붉은 먼지가 기분을 언짢게 한다.


 이른 겨울 아침, 차 머리를 집 앞의 둑 위로 올리는 순간 눈부시게 붉은 해를 껴안던 그 곳. 바로 그 동편의 산이 벌겋게 파 헤쳐져 깎이고 있기 때문이다.


 영덕 - 김천간의 4차선 도로 확장 공사의 일부 구간인 안동 - 예천 구간의 작업이 3월부터 시작되고 있다. 동편의 산은 10여일 전부터 덤프 트럭이 육중한 기세로 오르락 내리락 하더니 드디어 산허리가 옴폭옴폭 잘려 나가고 있다.


 붉은 먼지와 소음은 차치하고라도 벌겋게 생채기가 나고 있는 산의 모습을 보면 산이 사라져 버린다는 속상함과 함께 이 공사가 우리 집의 일과 무관하지 않기에 심사가 여간 틀리는 게 아니다.


 3년 전, 동네 근처로 새 도로가 지나가게 될 것이란 소문으로 온 동네가 뒤숭숭했다. 우려하던 대로 여덟 마지기 논 가운데를 4차선 도로가 지나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아버님은 낙담이 되셔서 술만 들이키셨다. 여덟 마지기의 옥답은 손바닥만한 세 쪼가리의 자투리 땅만 남기고 폐답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게 어떤 땅인데. 물대기 좋고 넓어서 농사 짓기 좋고."


 "보상비 나오면 대토하면 되잖니껴."


 "보상비가 우리 맘대로 되나? 돈이 풀리면 땅 값이 올라서 그 돈으로 서마지기 논도 못 산다."


땅을 잃어버렸다는 낙심으로 온 겨울 내도록 애를 끓이시던 아버님은 그 일로 출타 중에 유명을 달리 하셨다.


 지난 해 11월 안동 시장의 직인이 커다랗게 찍힌 종이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현 거래 시가에 훨씬 못 미치는 보상 가격이었다. 공사를 수주 받은 업체의 직원은 우리 논에 다릿발을 세워야 하니 빨리 보상 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십사 하고 여러 차례 들락거렸다. 도로 공사를 할 때 교각을 세우거나 수로를 내기 위한 콘크리트 작업을 먼저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들, 도장 찍어 주나 봐라. 다릿발 좋아하네."


 나 또한 논을 잃어 버렸다는 상실감에 더하여 무지랭이 촌뜨기들이라고 이렇게 푸대접을 해도 되는가 하는 분노로 아버님 못지 않게 독설을 퍼부어 댔다. 세 쪼가리의 논을 생각하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나 민초들의 힘없는 항변은 지극히 사무적인 행정 기관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내 독설은 서서히 풀이 죽어만 갔다. 결국 몇 개월 더 버티다가 보상 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고 말았다.


 그 도로 공사가 이제 착공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 공사를 지켜보는 내 시선이 고울 리가 없겠지만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정월 대보름날 불붙은 관솔 가지를 넣고 불 깡통을 돌리며 쥐불놀이를 하던 그 산꼭대기. 내 유년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져 가고 있다는 가슴 쓰린 허탈감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개발의 필요성은 인정한다. 도로가 확장되면 산업 물량의 수송이 용이해지고 교통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됨으로 인하여 경제적 손실도 많이 감소될 것이다.


 그러나 직접 당해 보지 않으면 누구나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발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피해를 당하게 되는 사람들의 마음의 응어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개발 계획이 있을 때마다 소란스러움이 생긴다. 행정 기관에 집단으로 항의 집회를 열고, 개별로 항의 소란을 피우고 진정서를 보내는 등.


 안동댐, 임하댐, 중앙고속도로 건설 등, 안동에도 여러 건의 큼직한 공사가 있었다. 선조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을 떠나 엉뚱한 곳에 집단 이주를 하는가 하면, 신시가지를 형성하여도 상권이 형성되지 않아서 면 단위의 재정이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도로변에 집을 가진 C모 선생님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두 번이나 집을 새로 지었는데 이번 도로확장 공사로 인하여 또 2년도 안된 그 번듯한 집을 부수어야 할 처지이기도 하다.


 볕이 따사로운 휴일 휘적휘적 둑 위에 올라가 보았다. 집 앞의 건천에도 예외 없이 불도저가 쇳소리를 내고 있다. 건너 쪽 제방도 푹 패여 생채기가 생기고 멱감고 잡초 뜯어 소꿉놀이 하던 모래밭도 뒤집혀져서 보기가 흉하다.


 유년 시절의 놀이터였던 제방의 아카시아 터널은 마을의 울타리 구실을 하였다. 아카시아 사이로 보이는 집들의 모습은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는 동네의 인심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무척 매력적이었었다. 그 아카시아 울타리가 회색 시멘트 담장으로 바뀔 때 그렇게 애석할 수가 없더니 그나마 그 제방조차 허물어지고 모래밭의 고운 속살도 허물 벗겨진 등짝처럼 되어 버렸다.


 이젠 아카시아의 달착한 향내와 풋풋한 꽃맛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넘친 못 물을 따라 내려온 돌 틈 사이의 붕어를 훔치던 손맛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편 산 위에서 쥐불 깡통으로 보름달보다 더 큰 달을 만들던 모습은 장관이었는데.......


 북덕유에서 남덕유까지 16시간의 지옥 같은 종주 산행을 한 적이 있다.


그 때의 고생으로 다시는 널 보지 않겠다던 덕유산이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장으로 허옇게 깎여질 때 이젠 덕유도 끝장이라고 산 친구들과 함께 탄식을 했다. 국내 환경 단체에서는 또 얼마나 반대를 했었던가. 새해 첫 해돋이를 산 정상에서 보기 위해 새벽의 덕유를 오를 때의 그 기분을 또 느낄 수 있을 지......


 대구시에서 비슬산을 관광지로 개발하려고 정상 턱밑에까지 도로를 닦느라 기암이 망가지고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베어지고 있단다. 비슬산 정상 부근의 오각형의 대평원에는 철쭉 관목이 융단처럼 깔려 있는데, 그 멋진 철쭉 밭이 해를 입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한 번 망가진 자연은 다시 회복하기가 힘이 든다. 특히 헤쳐진 산은 영원히 복구할 수 없다. 개발과 보존은 창과 방패와 같은 관계로 그 시행에 있어서 문제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향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시골에서 자라서 그런지 자연은 있는 그대로가 가장 좋다. 지리산의 노고단을 승용차로 편안하게 올라가서 요란하게 지어놓은 휴게소에 앉아 잠깐 내려다 본 것으로 지리산을 느낄 수가 있겠는가.


 얼마 후면 동편의 산 위에서부터 이곳 제방까지 번듯한 4차선 도로가 생길 것이다. 덕분에 나의 출근길도 한결 편리해 지겠지만 망가진 산과 쪼가리 땅을 매일 보게 되는 기분은 그리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1995. 새 길 공사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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