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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사는 이야기

강아지를 들이면서

by 여왕벌. 2000. 2. 11.

 

                                               강아지를  들이면서 

 

 

  대문을 여시는 어머니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누구를 나무라는 것 같은데 매우 재미있어하시는 것이다.


"에이, 요놈아 좀 가만히 있어라."


"어허! 요놈이, 저리 안 갈래?"


빗자루를 어깨에 을러메고 계시는 어머니의 한 쪽에 까만 눈을 반들거리며 까불고 있는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라이트에 비쳤다.


녀석은 크락션을 아무리 빵빵거려도 겁내는 기색도 없다. 목에 멘 긴 줄을 가지끈 잡아당겨서 어머니 쪽을 향하여 앞다리를 쳐들고 있었다. 자꾸만 닫히려는 대문을 잡고 있던 어머니는 할 수 없으셨던지 녀석을 끌어 당겨서 길을 틔워 주셨다.


"웬 강아지?"


"니 외사촌 오래비가 오늘 왔다 안 갔나."


지난 추석 후 7년이나 같이 살던 누렁이 '맹돌이'가 죽었다. 그 녀석은 어미 고양이만 할 적에 우리 집에 와서 참 오래도 살았다.


귀가 쫑긋한데다가 등허리 선이 날씬한 아가씨 같이 상큼하니 빠졌고 꼬리가 위로 감겨 올라가 있어서 그놈의 조상에는 진돗개의 피가 사돈의 팔촌쯤 섞여 있을 거라고 우겨 볼만큼 잘 생겼다. 게다가 얼마나 요란하고 매섭게 짖어대는지 대문간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선뜻 들어오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개라면 털이나 날리고 개빈지나 옮기는 진물이라고 가까이 하길 싫어하시던 어머니도 아버지 가신 후로 한 식구처럼 마음을 주시며 긴 밤을 맹돌이에게 맡기고 편하게 주무셨더랬다.


그런데 지난 추석 때, 생일처럼 잘 먹으라고 담아준 닭고기 찌꺼기를 먹다가 뼈가 목에 걸렸는지 상한 음식에 탈이 났는지 먹은 것을 계속 토했다.


"야야, 개가 죽었다."


아침 잠을 깨우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젖은 듯했다. 영 안 좋으신 기색이시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늘어져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고깃국물도 부어주고 등도 쓸어 주며 며칠을 걱정 했는데 결국 목숨이 다한 모양이었다.


제딴에는 재롱피운다고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껑충거리다가 어머니 발길에 채이기도 했고, 묶인 줄을 끊고 고추밭이며 채소밭을 뜀질을 해서 밭을 온통 짓삶아 놓아서 두들겨 맞기도 했다마는, 미물이라도 오래 함께 살면 정이 든다고 이른 아침 굳어 있는 녀석의 모습이 어머니의 마음을 무겁게 하셨던 것이다.


새벽같이 일어나신 어머니는 내가 볼까봐 이웃집 어른께 부탁하여 치워버렸단다.


"어쨀라고?"


늙은 개의 마지막이 혹시나 엉뚱한 곳으로 전달될까 걱정했더니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으니까 만운못 가의 어디쯤에다 묻었을 거라 하신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함께 있을 때는 그 자리가 그렇게 큰지 모르다가 잃고 나서야 의미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7년 동안 살갖게 굴며 큰집의 허전함을 메워주었는데, 녀석이 사라진 대문간이 참 덩그렇다.


"야야, 짐승을 오래 키우면 안 좋단다."


어머니는 벌써부터 누렁이를 팔고 작은 강아지를 사놓자고 하셨지만 내가 부득부득 우겨서 말렸었다. 둑 위에서 집 쪽으로 차머리를 틀 때부터 꼬리 흔들고 짖어댈만큼 반겨주던, 한 식구나 다름없는 녀석을 개장사꾼에게 팔아버리면 그 마지막은 뻔한 것이 아닌가.


녀석을 잃고 난 후에야 나의 만류를 못이기시며 말끝을 흐리시던 어머니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언젠가는 맞게 될 이런 사태를 미리 예견하고 누군가를 잃는 애달픔을 또 겪고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나 또한 이렇게 서운하고 언짢은데 어머니의 마음이야....... .


그런데 누렁이를 잃고 두어 달 비어있던 집에 털이 매끈하고 다리가 잘록한 조그마한 애완용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온 것이다. 군살이라곤 없이 적당하게 말라있고 모양새가 제법 괜찮은 놈이었다.


얼마 전 어머니가 외사촌 오빠한테 전화를 하더니만 웬 복에 팔자에도 없는 애완용 강아지를, 그것도 공짜로 얻게 된 것이다. 개를 구한다는 오빠의 말을 듣고 이웃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얼씨구나 그냥 주더란다. 집 앞을 오가는 오만 사람들을 참견하며 하도 쓸데없이 짖어대어서 진절머리가 났다나.


어머니는 그 녀석을 '쌀개'라고 하셨다. 반지르르 윤이 나는 털가죽이 곡식 중에서도 으뜸인 '쌀' 만큼이나 볼품있다는 뜻이리라.


이 놈은 아무래도 작은 종자라서 더 자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덩치도 조그마한 것이 얼마나 까불거리는지 가까이 다가가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바지가랑이를 물어 잡아당기고, 뒷발로 서서 기어오르려고 안 하나, 비키라고 밀치면 발라당 누워서 네 다리를 들까불며 데굴데굴 방정을 떨어댄다. 하도 촐싹거려서 '촐랭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어머니는 녀석의 하는 짓이 곰살스럽고 귀여워서 어린 손자하고 장난하듯이 밥을 줄 때마다 실갱이를 하신다.


녀석은 낯설이를 하느라고 며칠 동안은 잘 짖지를 않았다. 너무 짖어서 보냈다더니 이래가지고 집이나 지키겠냐고 어머니는 돌려보내려고 하셨다.


그런데 요즈음은 제법 짖는 흉내를 낸다. 하기야 맹하게 지켜보고 있다가 사람이 현관 앞에서 기척을 한 후에야 박자 늦게 짖어대어서 탈이지만.


그저께는 옆집의 고양이 새끼가 대문간에 살랑살랑 꼬리치며 나타났다. 보통 개와 고양이가 만나면 견원지간처럼 '으르렁' '칵칵' 대며 털을 곤두세우는데, 이 어린 고양이는 덩치가 조금 더 큰 촐랭이를 제 어미쯤으로 만만하게 생각하는지 영 신경을 안 쓰는 것이었다. 헌데 더 가관은 제 밥을 고양이가 먹고 있는데도 이눔의 촐랭이는 누워서 멀거니 보고만 있는 게 아닌가.


두 녀석이 하는 꼴이 재미있어서 가만히 지켜보았더니, 슬그머니 일어난 촐랭이가 고양이한테로 슬슬 다가오는 것이었다. 옆에서 기웃기웃 들여다보다가 장난기가 발동하는지 밥 그릇에 쳐박고 있는 고양이의 머리를 앞발로 툭툭 건드리는 것이다.


고양이가 가느다랗게 '애옹' 하고는 별 반응이 없자 괜히 혼자 후닥닥거리더니 이번에는 꼬리를 물려고 덤빈다. 고양이는 살랑 살랑 꼬리를 가볍게 흔들며 잘도 피한다. 녀석은 움직이는 꼬리를 장난감쯤으로 생각하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더니만 기어이 꼬리를 물고 당겼다.


뜨끔한 통증에 놀란 고양이는 휙 돌아서더니 녀석의 콧등을 사정없이 할퀴어버렸다. 장난치다가 일격을 당한 녀석은 깨갱거리고 비명을 지르더니 제 집으로 쫓겨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는다. 구석에 쳐박혀 킹킹거리면서 콧등만 핥고 있다. 하는 짓이 덜떨어진 숙맥 같다. 꾀없이 덤벙거리다가 놀란 녀석은 다시는 지분거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 일을 잊어버렸는지 녀석은 오늘도 고양이를 찝쩍거린다. '앵'하고 고양이가 소가지를 내면 도망가는 흉내를 반복하고 있다. 까불거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1학년 아이하고 똑같다. 좋아하는 짝꿍을 짓궂게 약 올리며 히죽거리는 장난꾸러기 같다.


녀석은 혼자 남는 것을 참 싫어한다. 어머니와 대문을 닫고 집을 나서면 어린애가 칭얼거리듯이 애처로운 소리로 낑낑거린다.


녀석은 또 눈치가 빤해서 제 귀여워하는 것은 잘 안다. 아기 대하듯이 말을 붙이면 꼬리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귀를 착 눕힌다. 복종한다는 거다.


애완용 동물을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맛에 기르는 것 같다.


누렁이를 잃고 한 동안 허전했는데 녀석의 촐싹거림으로 웃음을 가져다주어서 다행이다.


이 녀석 또한 오래 한 식구로 있다가 언젠가 누렁이처럼 곁을 떠날 것이다. 그 때 녀석을 잃는 슬픔을 겪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정을 안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녀석의 재롱으로 어머니는 한결 즐거우시다.

 

2000. 2 . 강아지를 들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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