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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사는 이야기

토정비결

by 여왕벌. 2002. 1. 31.
 

토정 비결


  임오년이 시작되었다. 새해가 시작되면 한 해의 모든 일이 순탄하길 기원하게 된다. 정초에 집안 어른들은 한 번쯤 화투점을 쳐보기도 하고, 길거리를 지나치다가 토정 비결 가판대를 기웃거리기도 하면서, 새해 운수를 궁금해 한다. 더러는 전문적인 점집을 찾아가서 재물, 사업, 결혼, 승진 등에 대하여 앞날을 알아보는데 거금(?)을 투자하기도 한다.

  요즈음은 인터넷의 사주 사이트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인터넷 점은 미신을 믿는다는 주위의 핀잔은 듣지 않고, 1000원 ~2000원 정도의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점이라는 것이 묘한 마약과 같아서 한 두 번 그것에 의지하다 보면 중독이 되어서 매사에 결정을 점괴에 의존하게 된다. 주변에 있는 한 동료 선생님은 집안에 조그마한 일만 있어도 '어디 가서 물어보니 하지 마라더라' '동쪽으로 이사를 가면 좋다더라' 하면서 쪽집게 점집이라고 동료 선생님께 적극적으로 권하기도 한다.

  자신은 절대로 점괴를 믿지 않는다는 사람도 '운수가 사납다' 느니, 운이 좋다' 느니 하는 말로 일의 결과를 운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 근본에는 내 사주 팔자에 의한 운명의 결정이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은연 중에 자신의 운명을 이미 정해놓은 사슬 속에 가두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일요일 동생네가 식구들을 데리고 집에 다니러 왔다. 늘 바쁘다고 전화로 안부를 대신 하더니 새해도 되고  해서 어머니를 뵈러 온 것이다.

  내 방을 기웃거리던 동생은 새로 들여 온 컴퓨터를 보더니 인터넷 전용선이 깔려 있다는 말에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인쇄물을 빼어든 동생은 싱글벙글이었다.


 "이야! 올해는 만사형통이구나! 꽂이 만발하니 사업이 뜻대로 번창 할 것이고, 귀인을 만나 해외로 나갈 수가 있다니 6월 쯤 일본에 갈 계획하고 꼭 맞는구먼."


  동생은 인터넷에서 자신의 토정 비결을 뽑아 본 것이었다. 동생은 작은 벤처 기업을 운영하면서 작년 한 해동안 어지간히도 안 풀렸다. 가정 내의 일도 계속 꼬이는 바람에 금전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며 고생을 하였기 때문에 올해 토정 비결의 내용에 은근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작년에는 아흡 수라서 악수가 많더니만 올해는 횡재수네."

 "그대로 다 된다면 세상에 안 되는 일 없겠다."


  동생의 들뜬 듯한 소리에 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그래도 안 좋다는 말보다 좋구만. 좋지 않은 수가 있다면 조심하고 대비하면 될 것이고."

 "하긴 그래, 밑져 봐야 본전인데, 나도 한번 볼까?"


  사실 얼마 전에 회원으로 가입한 사주 사이트를 검색한 적이 있었다. 맛뵈기로 올려놓은 내용을 보고 볼까말까 망설이다 사용료를 결재하라기에 끊어버렸었다. 솔깃해 하는 나의 태도에 동생의 재빠른 손놀림으로 뽑혀 나온 나의 토정 비결은 정말 그럴 듯 했다.


 [금년의 운은 비교적 평탄하고 즐거운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천마를 타고 다닐 수 있으리니 해외 유학을 가거나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다니게 됩니다.

  여행을 할 기회가 있다면 올 한 해동안 마음껏 다니는 것도 이롭습니다. 거처하는 곳에 있어서 변동수가 있으니 새로운 거처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신운이 대길하고 화평하니 금전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한 해를 보낼 수 있습니다. 행동에 있어서 조급한 판단은 해로우니 열 번이고 다시 반복해서 생각하면 오히려 아름답습니다. 일의 시작보다는 마무리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옳거니 천마를 탄다고? 누나 승진하겠네. 거처를 옮길 수라면 분명하다."

 "정말 그렇네."


  올케도 신기한 듯이 반색을 하며 거들었다. 8월의 운세는 더 활짝 피었다.

  

  [널리 이름이 알려지고 유명세를 타게 되리니 기쁘고 경사스런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슬하에 경사가 생겨 자식을 얻게 되거나 귀한 자리에

  발탁이 되는 경사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널리 해외로 여행을 다녀도

  이롭습니다.]

 

  "8월에 유명세에 경사스런 일이라면 정말 꼭 맞네."

 

  동생은 확신을 한 듯 목소리가 경쾌하다. 우째 이런 일이? 그것 참 용하다. 모두들 9월에 발령이 날 거라더니 토정 비결이 맞긴 맞구나. 해외 여행 수라. 그렇지, 교사로서 마지막 방학을 이용하여 다시 가보고 싶던 네팔 여행을 하는 거다. 올해의 운수가 이렇게 좋은 걸 보니 만사가 순조롭겠구나.

  신기하게도 올해의 예상되는 일을 토정 비결이 이렇게 맞출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냥 호기심으로 한번 보는 거라며 토정 비결을 폄하하던 나의 태도는 어느새 절대적인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 나는 월요일 교무실에서 나의 운세를 자랑삼아 내놓았다.

 

  "거 희안하지요? 이름을 날리고 천마를 탄대요."

  "맞긴 맞다. 천마가 아니고 철선을 타겠지."

  "예? 철선이라니요?"

  "해외 여행 수가 있다면서? 그거 철선 타고 바다 건너 울릉도 갈 운이다."

  "그래, 토정 비결은 해석을 잘 해야지. 딱 맞네. 울릉 댁."

  "그럼, 울릉도로 거처 옮길 준비나 하지. 울렁 울렁 울렁 댁."


 교장선생님의 놀림에 교감선생님까지 맞장구를 치니 교무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울릉 댁이라는 놀림에 약오르기보다 대길한 운세에 흐뭇하여 함께 웃어버렸다.

  토정비결이란 것이 통계치에 의한 운세 풀이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비슷하게 들어맞게 된다. 운세 풀이를 꼭 믿어 의심하지 않는 것 보다 길한 운세는 좋으니 기대를 가지고 노력을 하게 되고, 불길한 운세는 조심을 하니 액운을 미리 막아 비켜갈 수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닐까? 점괘나 운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보다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만들어가는 데 하나의 활력소로 활용하면 어떨까?

 

  그런데 은근히 불안하다. 정말 울릉도로 승진 발령이 나게 될까?


200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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