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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사는 이야기

산비둘기 동무삼아

by 여왕벌. 2004. 11. 5.
 

산비둘기 동무 삼아



  베개 덩치만한 콩단이 벽에 기대어 서 있다. 비틀어진 콩깍지에서 흘러내린 노란 콩 몇 알이 마당에 데굴거리고 있다. 며칠 동안 짚단보다 더 큰 콩단이 보이더니만 오늘 어머니께서 콩 타작을 하셨나 보다.

  서편 통시(푸세식이라서 그렇게 부름)옆에는 뿌연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고 부서진 콩깍지 가루도 서너 삼태기 됨 직하다. 엉성하게 이가 빠진 키가 그 옆에 누워 있는 걸 보니 가을 바람의 도움을 받아 키로 콩깍지를 부치신 모양이다.

 

  얼마 안 되는 콩 농사라 제대로 타작 흉내 내기도 그렇고 도리깨질도 힘에 부치니 제법 몸통 굵은 몽둥이로 죽어라고 두들기셨으리라. 당신의 숨소리가 깊고 뒤척이는 움직임이 무거운 걸 보니 불편하신 몸에 무던히도 힘드셨을 것이다. 굳은살이 박힌 손바닥에 물집이 잡힐 정도라니.

 

  서 편 아래채 뒤에는 반 마지기도 안 되는 길쭉한 세모꼴의 텃밭이 있다. 십수 마지기 전답이 있으나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서 해마다 소작으로 팔아버리고 이 텃밭만은 어머니의 차지로 남겨둔다.

  아래채 벽 쪽의 텃밭 한켠에는 더덕 뿌리가 몇 년을 묵으며 해마다 덩굴을 올리고, 가느다란 머리카락 같은 산달래가 소복소복 무더기를 이룬다. 이웃에서 얻어 심은 취나물도 많이 번성하여 향긋함으로 봄철 입맛을 돋우어 준다.

 

  봄 내도록 어머니는 이 텃밭에서 비둘기와 숨바꼭질을 하셨다.

  옥수수 포기가 보기 좋게 난들거릴 오월 단오쯤이면 메주를 쑤는 노란콩 씨를 넣는다. 두둑하게 북을 올린 고랑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내고는 서너 개의 콩을 넣고 부드럽게 흙으로 덮으면 된다.

 

  봄비가 적당하게 와주면 싹이 일찍 트지만 봄 가뭄이 길어지면 하 세월이다. 비닐 호스를 길게 대어 수돗물을 뿌려 주지만 폭폭 잦아드는 봄비에 비하겠나? 마른 흙에는 기별도 없다.

 

  바로 이 때가 산비둘기에게는 질 높은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찬스이다. 이놈들은 콩을 넣은 밭을 귀신같이 알아채곤 날이 밝기가 무섭게 공략에 나선다.

  일어나기 싫어서 이불을 말고 있는 이른 아침 때 쯤이면 어머니는 벌써 서편 쪽 문 옆에 앉아 계셨다. 길다란 대나무 끝에 비닐 조각을 길게 잡아매어 담 벽에 기대어 두고 하염없이 시간을 죽이셨다.

  산 쪽에서 비둘기의 움직임만 보이면 깨진 세숫대야를 두드리고 긴 대나무를 휘두르신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을 아는지 이놈들은 새벽부터 콩밭에 모여드는 것이다.

  산비둘기는 잠시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도 잽싸게 날아들어 몇 군데의 콩알을 꿀꺽해 버리고 만다. 노랗게 올라오는 떡잎도 따먹어버리는 통에 본잎이 날 때까지 열흘은 족히 그렇게 지켜야 했다.

 

  산비둘기와 싸우시느라고 어머니는 끼니를 제 때에 챙기지도 못하시고 동네 어른들과 십원 짜리 화투도 당분간 포기하셨다. 비둘기와의 전쟁이 끝나고 나면 어머니의 얼굴은 봄볕에 새까맣게 그을려 깊은 주름이 더 하얗게 드러났다.

  작년에는 그렇게 대나무를 휘둘렀는데도 두어 차례 씨앗을 다시 넣어야 했다. 다행히 올해는 콩 모종을 포트에 미리 준비해 둔 덕분에 씨를 잃은 자리를 모종으로 채울 수 있었다.

 

  년 전에는 땅콩을 몇 골 심었다가 청설모에게 시주하고 작년부터 옥수수와 고추,무, 상추, 콩을 심으셨다. 그래도 콩은 뒷손이 가지 않아서 농사 짓기가 수월하다. 옥수수나 고추는 약을 뿌려주지 않으면 실속이 없다. 까만 딱정벌레 같은 것들은 옥수수 밑둥치를 싹둑 잘라버리고 고추에 탄저병이 오면 잎이 발갛게 말라버려서 풋고추조차 얻기 힘들다.

  올해도 가장 긴 두 골에 고추를 심었지만 고추가 붉기도 전에 탄저병이 번져서 그대로 삭아버리고, 애면글면 지킨 콩 포기가 그런대로 어머니의 수고에 보답해 준 것이다.

 

  집 앞에는 겨울 산그늘이 비껴갈 만큼의 거리에 운동 삼아 오르기 적당한 산이 있다. 어릴 때는 잔대며 빼기(솜양지꽃 뿌리)를 캐먹고 밤을 따러 부지런히도 오르내려서 토끼 길 같은 여러 개의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오락기에 정신없는 아이들이 쳐다보지도 않으니 감히 숲을 헤치고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잡풀이 엉겨 있다. 숲이 우거지니 자연 산 짐승이 꾀게 되고 먹을 것을 찾아 슬금슬금 집 근처까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지난 해 가을, 마당 동편의 감나무에서 딴 감이 제법 되었다. 어머니는 그 중에서 알 좋은 놈을 골라서 곶감을 깎았다. 이른 아침 곶감 소쿠리를 옮기시던 어머니가 이상하다며 고개를 흔드셨다. 가을볕에 말랑말랑하게 먹기 좋게 마른 곶감이 몇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엊 적에 분명히 있었는데 고얭이가 물어갔나? 동네 아들이 집어갔나?"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혀를 차시던 어머니는 며칠 후에야 청설모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날도 소쿠리를 볕드는 곳에 옯겨 놓고 잠시 다른 것을 보고 있는 사이에 청설모가 빨간 곶감을 입에 물고 담 너머로 꼬리를 감추더라는 것이었다.

  그 뒤 어머니의 단도리로 곶감을 더 잃지는 않았지만 이 놈은 겁도 없이 담이며 지붕에서 수시로 까만 머리를 내밀었다. 청설모의 저지래는 곳곳에서 나타났다. 땅콩에 알이 여물어 삶아 먹기 알맞을 때쯤이면 청설모는 땅콩 밭이 좁다하고 헤집고 다녔다.

 

  "하회 어른 댁은 땅콩이 덜 여물었는데도 다 캤단다."

  "왜요?"

  "그 놈에 청살피 때문이 아이가. 하도 후비 가주고 미야(미워)서 일찍 캤잖나."

 

  산 가까운 밭의 알곡이나 열매는 까치나 꿩, 비둘기 같은 새들만 저지는 것이 아니라 청설모도 한 몫을 거든다. 골 깊은 곳에는 멧돼지가 아예 사과나무 가지 째로 훑어 버리고 고구마 밭을 들쑤셔 놓기 일쑤이다.

 

  농사가 없는 우리야 산짐승의 피해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봄날이면 비둘기로부터 콩을 지키기 위해 숨바꼭질을 해야 하고 ,손바닥만한 텃밭에 재배할 작물 선택에 신경을 써야 할 정도이다. 멧돼지가 아닌 산비둘기 정도는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겠다.

  그래도 손바닥만한 텃밭이 당신의 소일거리로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이른 아침부터 옥수수 곁가지도 치고, 열무도 솎고, 풀도 뽑고, 호미로 북을 돋아주며 매일 정성을 쏟으신다. 두 식구 세끼 찬거리와 간식거리를 해결해 주고 긴 낮 시간의 무료함을 잊을 수 있게 해 주니 이 보다 더 좋은 놀이터가 어디 있겠나.

  아침부터 산비둘기와 싸우든지 말든지, 수돗물로 가뭄을 넘기느라고 밭에서 얻는 수확보다 물값이 더 들든지 말든지 그저 가꾼 만큼 잘 여무는 재미로 사신다.

 

  비둘기와 청설모에게 시달리면서도 올해는 이 텃밭에서 고만고만한 무를 서너 접, 노란 콩을 두어 말 가웃 얻었으며 여름이 다 되도록 옥수수를 삶아먹었다.

  어머니는 이제까지 모셔 오던 제사를 추석 때 맏이에게 물려주셨다. 내가 혹시나 멀리 이동되지나 않을까 싶어서 나를 따라가실 요량이다. 당신이 혼자 외로워서가 아니라 다 큰 딸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농담 삼아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는 안다. 이 곳이 당신의 극락이라는 것을.

 

  후년 봄에도 산비둘기를 동무 삼아 싸우면서 콩을 지켜야 하고, 호미 들고 밭고랑의 풀도 뽑아야 한다. 가을이 되면 큰 놈네 작은 놈네 갖추갖추 보따리를 여미시는 재미가 사는 낙이 아니겠나.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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