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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사는 이야기

그리운 히말라야 품속에서(1993. 12. 29~1994. 1. 7)

by 여왕벌. 2012. 1. 13.
 

히말라야에서 쉬다



1년 동안 벼르던 네팔에 도착하기까지 12시간의 비행은 너무 짧았다.


벅찬 기대를 안고 수도 카투만두 상공에서 시가지를 내려다 본 첫 느낌, '붉다!' 는 것이었다. 그 느낌에 대한 의문은 산록을 트레킹 하는 동안 풀리게 되었다. 산지를 형성하고 있는 토질이 붉은 색이라서 건물의 벽이 붉으니 붉은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팔은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힌두 왕국이란다. 관공서나 호텔, 식당에는 왕과 왕비의 사진이 걸려 있다. 마치 예전 우리네 학교 교무실에 대통령 사진 걸어놓듯이.


포장이 덜 된 카투만두 시가지는 매연과 먼지로 부옇게 흐렸고, 신호등이 드문 거리에는 교통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곳곳이 지저분한 오물로 악취를 풍겼지만 관공서나 힌두 사원이 그나마 수도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인도의 거리보다 안정되고 깨끗하다고 하니 그저 그런가 보다 할 수 밖에.


봉고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 일행은 호텔 밖에 걸어 놓은 붉은 환영 현수막을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트레킹 하러 오신 손님께서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한국 여행객을 주 고객으로 하고 있기에 고객을 기분을 맞추려는 호텔측의 상술이겠지만 어법에 맞지 않는 서툰 글씨라도 그 정성이 애교스러웠다.


짐을 옮겨주며 방까지 안내를 하던 호텔 종업원은 내 목에 걸고 있던 하회탈 목걸이에 자꾸만 눈길을 주었다. 1500원짜리 목걸이라 부담도 없고 기념도 될 것 같아서 선뜻 건네주자 종업원은 깊숙이 허리 숙이며 만족스런 얼굴로 돌아갔다.


그런대로 깨끗한 숙소에서 1박 후, 25인승 경비행기로 히말라야 계곡 사이를 곡예를 하듯 30여분을 날았다. 히말라야를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다. 카투만두에서 서쪽으로 200㎞떨어져 있는 호반의 도시 포카라는 그저 작고 한적한 도시였으나 산악인들을 태운 비행기로 안동 버스터미널 정도의 작은 공항 대합실이 언제나 북적거린단다.


예약된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하여 오전 내내 조바심하며 짜증스러웠던 기분은 스치듯이 지나가는 나무 숲과 부딪칠 것 다가오는 산 옆구리, 붉은 계단식 논과 드문드문 보이는 부락의 아름다움, 만년설이 녹아 계곡 사이를 실같이 흐르는 강 줄기, 멀리 조망되는 히말라야 연봉들의 감격으로 말끔히 보상되었다.


8박 9일 동안 마을을 찾아 하루 종일 걷고 야영으로 숙식을 해결하였다.


히말라야의 대표적 봉우리인 람중 히말,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 남봉, 마차푸차레 등을 조망하면서 현지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하는 산행은 정말 꿈 같았다. 백만원 가까운 경비가 너무 싼 것이 아닐까 하며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높은 산지라서 고산병으로 어지러움을 느끼는 일행도 있었지만 모두들 건강하게 산행을 하였다. 낮에는 더워서 반팔 옷을 걸쳐야 했고, 밤에는 침낭 속에서 두터운 양말까지 신고 표면적을 최대한 줄인 채로 잠을 청해야 했다.


고산지라서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공동 우물이나 샘물로 식수를 해결한단다. 그러기에 세탁이나 목욕은 중요한 행사나 있어야 가능한 생활이라서 씻는 것은 거의 생략하고 있었다. 씻는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들의 체취는 다소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도 고양이 세수를 해야 했고 머리를 감는 것은 엄두도 못했다. 그래도 참다못한 한 일행이 포터들이 길어온 식수로 머리를 감다가 따가운 눈총 세례를 받아야 했다.


우리의 무거운 짐과 야영장비는 현지 주민인 포터들의 도움을 받았다. 다행히 여행사에서 라면, 쌀, 떡국, 김치 등의 재료를 준비해서 음식 고생은 면할 수 있었다. 향료를 넣은 음식은 다소 비위에 맞지 않았지만 야영지에서의 즉석 돼지 바베큐는 정말 일품이었다.


고지 3,400m의 산지에는 군데 군데 마을이 있었다. 산록의 그들은 꽃을 좋아하였다. 복숭아나무 만한 포인세티아로 울타리를 꾸몄고, 집 뜰에 심겨 있는 맨드라미와 메리골드, 백일홍 같은 꽃들은 우리의 시골집을 연상시켜 주었다. 꽃을 보고 반가워하는 내게 인상 좋은 주인이 꺾어 준 노란 메리골드 향기는 종일 나를 흐뭇하게 하였다.


여러 마을을 지나면서 집집마다 원뿔 모양의 대바구니가 마당 한쪽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용도에 대하여 모두들 한마디씩 아는 체를 했다.


그 중에 병아리를 키우는 데 쓸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그럴 듯하여 거기에 동조를 하였더니, 원뿔 모양의 대바구니는 지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그들의 필수품이었다. 둥근 아랫부분을 가로질러 끈을 매어 놓았는데, 짐을 가득 담은 대바구니를 거꾸로 등에 업고 긴 끈을 이마에 걸치면 멋진 지게가 되었다.


첫 야영지인 페와 호숫가의 아침, 안개를 헤치고 불쑥 솟아오르는 마차푸차레의 출현에 우리는 까무러치듯이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었다. 호수 건너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온 마차푸차레! 너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네팔인이 가장 신성시하여 절대로 오르지 않는다는 이 봉우리는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만년설을 이고 위엄있게 우리를 내려보고 있다. 사진으로만 대하던 마차푸차레를 직접 눈앞에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하다.


마차푸차레의 감격을 뒤로하고 역대 네팔 왕들의 사냥 길을 따라 온 종일 걸었다. 잠시 목을 축이러 구멍 가게에 들르니 아이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신기하게 쳐다본다. 어린 시절 코쟁이 미국 사람들을 신기해하며 따라다니던 생각이 났다.


넷이서 가게의 맥주를 거덜 내 버리니 얼굴이 홍당무다. 저녁 무렵 일행보다 조금 늦게 야영지에 도착했다.


걷이가 끝난 마을 근처의 야영지에 짐을 풀고, 포터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일행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았다. 붉은 흙벽으로 쌓아올린 십여 호의 집들이 띄엄 띄엄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은 조용하다. 간혹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돌담 뒤에서 얼쩡거린다.


마을 한쪽 널찍한 논에 청년들이 공을 차느라 분주하다. 요령 있게 공을 다루어서 용케도 산 아래로 굴러 내리지 않는다. 한쪽에는 옛날 시골의 학예회처럼 천으로 커텐을 만들어 놓고, 포인세티아 꽃잎을 엮은 긴 줄을 운동회 만국기 줄처럼 이리 저리 쳐 놓은 것을 보니 축제가 있을 법하다.


우리는 서툰 영어와 몸짓으로 마을 사람들과 어울렸다. 네팔에서는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교과목으로 정하여 의사소통이 원활하다. 우리의 영어가 오히려 더 서툴다.


막걸리 같은 뿌연 술잔이 오가고, 쟁반에 담은 풀기 없는 식사를 손으로 집어먹으면서 사람들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자 남포불과 랜턴으로 불을 밝혀 놓고, 마을 사람들은 기대어린 시선으로 축제장 앞에 모였다. 모두들 판쵸를 하나씩 두르고 있다. 산악 지대라서 담요처럼 생긴 판쵸는 추위를 이기기 위한 그들의 평상복이다.


커텐이 열리면 그들의 노래와 춤이 시작되고, 고운 전통 옷을 차려 입은 아가씨는 포인세티아 만국기 아래서 간드러지게 춤을 추었다.


1993년의 마지막 밤, 그들은 그렇게 망년회를 하고 있었다. 가슴에 커다란 꽃을 꽂은 마을 촌장과 어른들의 위엄 있는 표정 뒤로 저 멀리 안나푸르나의 자태가 달빛에 신비스럽게 빛을 발하고. 우리도 아리랑 가락과 어깨춤으로 그들과 함께 마지막 밤을 멋드러지게 보냈다.


야영지에 돌아 온 우리는 그 기분을 그대로 삭이기 아까워 오만가지 민요를 부르며 애국심(?)을 발휘하였다. 괜히 집에 대한 향수로 술잔과 모닥불을 벗하며 밤을 새웠다.


밤낮의 기온차가 심하고 물이 부족한 고원이지만 멀리 거대한 설산을 보면서 살고 있는 그들은 얼마나 순수할까? 야영지의 밤, 달빛에 빛나는 설산이 이마에 닿을 때,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충동으로 가슴은 벅찼다.


닷새째 마지막 야영을 하면서 붉으스름한 강물에 아쉬운 대로 땀 냄새를 씻을 수 있었다. 만년설이 녹은 물이라 꽤 차가웠지만 근질거리는 머리를 감을 수 있다는 후련함으로 추위를 감수할 수밖에.


밤 늦게 포카라로 돌아오던 우리의 미니 버스와 대형 버스의 충돌로 중상자 4명과 경상자 다수 발생, 돈을 흔들어 간신히 잡은 트럭에 실려서 포카라 병원에 도착했지만 형편없는 의료 시설로 절망하고.


찌그러진 의자 사이에서 구출된 나는 입 주위가 찢겨지고 다리를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지만‘“노 프라브럼!” 이라는 한마디로 원 외 취급을 당했다. 하는 수 없이 알코올 묻은 솜을 찾아서 입 주위의 피를 닦고 이불 없는 침상에서 추위와 충격으로 덜덜 떨며 밤을 보냈다.


사고 장소가 까마득한 계곡 중간이었다니 생각만하여도 끔찍하였다. 초파일 봉정사에 연등을 올린 정성이 갸륵하여 부처님이 보살피셨나 보다. 히말라야 어느 산 중턱에 산귀신이 될 뻔하지 않았나.


“옴 마니 밧매 훔!”


이튿날 오후 네팔 주재 한국 영사관까지 동원되고서야 특별 헬기를 타고 카투만두로 이송되었다. 그 몇 시간 동안 여러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 실망도 컸지만 진정으로 걱정하고 살펴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일그러진 얼굴을 손수건으로 가리고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며 마지막 카투만두 시가지 관광을 하였다.


카투만두 동쪽에 있는 파슈파티나트 힌두 사원바닥에 엎드려 묵상을 하고 있는 순례자는 무심의 지혜를 생각하게 하였다. 사원 이웃의 개방된 강변 화장터에는 방금 도착한 시신이 장작더미 위에서 연기를 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시신을 뒤적이는 모습을 보니 산중에서의 사고가 다시 떠오르며 몸서리쳐졌다.


8박 9일의 네팔 여행, 히말라야의 성스러움과 신비로움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비록 그 치맛자락 끝에서 머물다가 돌아왔지만 그 너른 품속에 며칠을 안길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싶다. 지금도 그 때의 상처가 남아서 아찔할 때가 있지만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이다.


사람마다 여행하는 방법과 여행지의 선호도가 다르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 속에 직접 부딪혀보는 여행을 좋아한다.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여행보다 고생스럽더라도 몸으로 부대껴 보는 여행이 체질적으로 더 맞는 모양이다.


역사 유물 관광 중심의 여행도 의미가 있겠지만 오지 원주민들의 순수한 모습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매력을 모른다. 달빛에 빛나는 설산이 이마에 와 닿는 그 감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네팔과 히말라야를 권하고 싶다. 아직은 때 묻지 않고 자기들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히말라야 산록의 사람들, 관광 수입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순수함을 잃어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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