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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사는 이야기

선생님이 치사하잖아요

by 여왕벌. 2016. 5. 4.

 

지네끼리만 비빔면을 먹었다고 교장샘한테 일러받친 6학년 엉아의 편지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찌 이리도 귀여운지요 ㅋ.



아침에 출근하니 책상 위에 삐뚤거리는 글씨로 쓴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내용을 확인하다가 어찌나 우습던지 킥킥거리며 웃음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누가 썼는지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지만 대충 누군지 짐작이 되었어요.


등교하는 스쿨버스가 도착할 시간에 마중을 나가서 짐작이 되는 녀석을 보고

안녕!! 하고 인사를 했더니 히이~!!! 하고 멋적은 듯 웃습니다.


일단 모른 체 하고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들께 편지를 보여 주었더니 다들 배꼽을 잡습니다.

당사자인 3~4학년 담임 샘도 마구 웃어제낍니다.

아마도 어제 상황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사연인즉슨.


우리 아이들은 결손 가정이 많아서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아침에 빵이나, 고구마 등 간식거리를 가져 와서 아이들에게 줍니다.


어제도 3~4학년 담임 ㅊ선생님이 비빔면을 준비해 왔나 봐요.


"자아~! 미술 시간에에요. 비빔면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양을 관찰합니다."


아이들에게 미술공부를 한다면서 비빔면을 끓여서 먹이고는

혹시나 해서 먹던 자리를 치우고 냄새도 지우느라고 향취제도 분사하고 그랬답니다.


ㅊ선생님은 지난 해 6학년 담임을 하면서 5학년 아이들과 함께 음식 만들기도 자주 하고 해서

먹거리가 있으면 늘 함께 해 왔던 터라

중간놀이 시간에 6학년 아이들이 교실에 놀러 오면 혹시나 들킬까 봐

그렇게 흔적을 지우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상대로 중간 놀이 시간에 6학년 언니들이 놀러를 왔고

촉 빠른 형아가 킁킁거리면서 냄새를 맡다가 바닥에 떨어진 라면 부스러기를 발견하고는

휴지통을 뒤져서 라면 봉지를 찾아 내었답니다.


그리고서는 왜 자기들은 안 주고 동생들만 먹었냐고 항의가 대단했나 봅니다.

결국은 미술공부 핑계를 대면서 넘기기는 했는데 그 녀석은 수긍이 안 되었던 가 봐요.


우리 학교는 6학년이 3명, 5학년이 3명, 3~4학년 3명, 1~2학년 5명 모두 14명이 전교생입니다.

6학년 한 사람은 전교 회장, 또한사람은 전교 부회장, 나머지 한사람은 반장인데

영리하고 운동 잘 하는 반장 녀석이 비빔면을 못 먹어서 속상하니까 제 책상 위에다 선생님을 고발(?)한 거지요. ㅎㅎ


그 녀석이 어제 하루 종일 내가 오는 걸 기다렸다고 선생님들이 전하네요.

하필 어제는 아침 일찍 출장을 가서 오후에는 학교에 없었거덩요.


오후 시간에 슬그머니 그 녀석 손목을 잡아서 내 방으로 불렀습니다.


"니가 편지 썼니?"


"네"


"왜~~?"


모른 척 하고 물어 봅니다.


"치사하게 자기네들끼리만 비빔면 먹었잖아요."


"그래? 못 먹어서 속생했겠네?"


"네"


"미술공부 하고 나서 먹었다던데?"


"그래도 그렇지요."


"반마다 공부가 다르니 다 함께 똑 같은 걸 할 수는 없겠지?"


"네"


" 6학년도 그렇게 맛있는 걸 먹을 기회도 있을 거야."


"선생님이 키 작다고 놀리는 건 잘못했네. 아마도 앞으로 놀리지 않을 거야."


"네...."


"이제 가도 돼요?"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 되었답니다.

중요한 건 왜 비빔면을 동생들만 먹었느냐는 거고 이 참에 선생님이 키 작다고 놀리는 것도 속상하고 그랬나 봐요.


울 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똑 같이 토닥거리면서 다투고 말 싸움도 하고 그럽니다.

ㅊ 샘도 이 녀석과 말다툼 하면서 키 작다고 몇 번 놀렸나 봐요. 그 건 잘못 한 거 같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버르장머리가 없게 될까 걱정하는 것 보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가족처럼 친구처럼 느끼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이 드네요.


라면을 먹지 못해서 속상했던 걸 제딴에는 교장선생님이면 다 해결해 줄 것 같았나 봐요.

이제 기분이 풀어 졌는지 가벼운 걸음으로 내 방문을 나가는 녀석의 뒤꼭지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이쁘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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