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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사는 이야기

냉이를 캐며

by 여왕벌. 2016. 3. 16.

2016. 3. 16.


"언니야~! 거기 나이 많나?"

"그래 찾아 보믄 있을 걸."


집 주변에 냉이가 있냐는 뜬금 없는 동생의 전화다.





한식 날 성묘도 할 겸 고향으로 남매들이 모이면서 마당에 불지펴 고기 구워 먹고 냉이로 부침개 부쳐 먹겠다는 건데

집 마당에는 냉이는 없고 망초와 개망초, 달맞이꽃 싹만 가득하다.


나는 내심 동생네 식구들 모이면 호미 하나씩 들려서 마당의 잡초들을 캐게 할 요량인데

동생들은 신나게 고기 구워먹고 한 잔들 할 생각에 기대가 크다.

  

시장에서 냉이를 사다가 전을 구워 먹어도 되겠지만 도로변이나 시궁창 가릴 것 없이

아무데서나 자라는 냉이를 캐 와서 팔 수 있기에 께름칙하다는 거다. 




어디서 냉이를 캐나 은근히 고민이 되어서 오후 시간 한 바퀴 학교를 순시하는 중에

학교 텃밭을 살펴보니 아고야~!! 밭 가장자리 한 쪽을 냉이가 완전 점령하고 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퇴근 시간 후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냉이를 캐기 시작하는데

뿌리도 굵직한 게 국거리로도 아주 딱이다.




유년 시절 이맘 때 쯤이면 학교에서 돌아 오자 말자 책 보따리를 툇마루에 던졌다.

커다란 보자기를 찾아서 허리에 질끈 동여 매어 커다란 주머니부터 만들었다.

마굿간 벽에 걸려 있는 호미를 하나 챙기고서 동네 언니들 꼬리를 잡으러 잰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짧은 해 그림자 꼬리가 길게 동쪽으로 늘어지는 시간 쯤이면

보자기 주머니는 냉이며 속속이풀이며, 꽃다지, 벼룩나물, 쑥 어린 순으로 제법 불룩진다.




보자기 속 나물을 축대 위에 부어 놓으면 엄니는 생콩가루에 버무린 냉이국이나 쑥국을 끓여주시곤 했다.

엄니의 음식 솜씨는 동네에서도 알아 줄 정도로 맛이 있었다.

특별한 반찬이 없어도 향긋한 냉이국 하나로 밥 한 그릇이 게눈 감추듯이 사라지곤 했다. 

 

엄니 가신지도 4년이 되었으니 이젠 그 냉이국 맛을 볼 기회가 없지만 

엄니의 냉이국 맛을 꿈 속에서라도 느껴 보고 싶다.




잠깐 사이 캔 냉이가 비닐봉지 가득하다.

아직 한식까지는 보름이나 남았으니 캔 냉이를 잘 보관해야 한다


"언니야~! 냉이 캐서 씻지 말고 신문지에 싸 가지고 냉장실에 넣어 두면 돼"


평생 엄마가 해 주시는 밥 얻어 먹고 학교 오가는 것 밖에 몰랐으니

부억 살림이 젬병인 내게 동생은 일학년 가르치듯이 일러 준다.


세탁기를 돌릴 줄 몰라서 동생한데 전화로 사용법을 물을 정도였으니

동생은 때때로 엄마처럼 잔소리 같은 걱정을 해 댄다. 




뿌리에 묻은 흙을 대충 털고 동생이 일러준 대로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냉잇국을 끓여보고 싶었지만

사택에는 음식 조리에 필요한 일습이 갖추어 지지 않았으니 아무 소용이 없다. 


주말에 집에 가서 냉잇국을 끓여 보는 걸로 미루어 놓고 

한 줌 따로 씼어서 라면 끓이는데 넣었더니 라면 맛이 아주 일품이다.


헌데 이 녀석이 보름동안 냉장고에서 제 향을 유지하고 있을랑가 모르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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