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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발길 따라

그리운 히말라야4--옴 마니 밧메 흠~!

by 여왕벌. 2012. 1. 15.

<마지막 야영지 카르포타>

 

1994. 1. 1. 새해가 밝았다. 부스스한 얼굴로 야영지에서 일어나니 아침 식사가 떡국이다. 

여행사에서는 센스 있게  새해라고 떡국을 미리 가져왔던 모양이다.

새해 아침 해를 받으면서 야외에서 떡국을 먹으니 임금이 부럽지 않은 기분이다.

한 사람 빼고는 다들 제대로 씻지 못하여 부스스한 모습들이다.

 

 

 

야영 사흘 아침, 머리를 감지 못하여 근질거리는 가려움을 참기가 어렵다.

우리가 먹고 세수하는 물은 500미터 정도 내려간 마을에서 포터가 길어온 물로 해결하는데,

일행 중 한 남자분이 20명이 세수를 해야 하는 작은 물통에서 머리를 감은 모양이다.

해서 그 분은 많은 사람들의 눈총 세례를 받아야 했었다. 오죽했으면 그 아까운 물로 머리를 감았을까?

 

 

식사후 세번 째 야영지 카르포타를 향하여  출발.

이 요상스런 구조물은 무엇에 쓰는 건지는 모르겠다.  못보던 것이라서 그냥 기념으로 담는다

 

 

 

지사파니힐 언덕 야영지에서 조망되던 하말라야 준봉들은 아래로 아래로 고도를 낮추어 내려오면서 점점 시야에서 사라졌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적당한 개울가에 잠시 머물렀다.

20 년 전에는 이렇게 무리지어서 이동하는 외국 관광객들은 마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기웃기웃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었다.

 

어느 산록 마을에서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용 볼펜도 손을 내밀던 꼬맹이에게 주어 버리고,

주머니에 들어 있던 사탕을 쥐어 주었더니 에이~! 칫~!하는 표정으로 저들끼리 뭐라고 떠들었다.

 

레쎔 삐리리~~♩♪~♬ 레쎔 삐리리~~♪~♬

우리 나라 아리랑 처럼 네팔에서 가장 흔하게 부르는 민요인 것 같다.

 

포터 일행 중에 노래를 잘하는 친구가 있어서 저녁 캠프에서나 잠시 쉴 때마다 노래를 불렀다. 하도 많이 불러서 우리도 따라 부르곤 했다.

 

 

 

강이 보이는 걸 보면 산록을 다 내려 온 모양이다. 야영지는 강가 적당히 너른 풀밭에 자리를 잡았다.  

나흘째 마지막 야영을 하면서 붉으스름한 강물에 아쉬운 대로 땀 냄새를 씻을 수 있었다.

만년설이 녹은 뿌연 강물은 꽤 차가웠지만 생각 보다는 이 정도 차가움은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거품이 잘 일지 않는 거친 물이었지만 목욕을 하고 근질거리는 머리를 감을 수 있다는 후련함으로 추위를 감수할 수밖에.

 

트래킹을 하다가 목이 마르다고 계곡이나 강물을 함부로 마시면 절대로 안된다,

네팔 원주민들은 그 강물을 식수로 마셔도 배탈이 안 난다는데 이 물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설사를 한다고.

 

 

<1994. 1. 2.>

마지막 야영이라고 저녁 식사후 맥주 한 잔과 노래로 아쉬움을 나누었다.

요즈음은 군데 군데 여행자 숙소가 있어서 잠자리만큼은 편하긴 한데 그 때는 TV 프로그램 1박 2일처럼 야영이 일상적인 때라

씻는 것 빼고는 그리 불편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침낭과 따뜻한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자면 하루 종일 걸었던 피로에 다들 곯아 떨어졌다.

트래킹 마지막 아침 철수를 하기 위하여 짐을 싸느라 다들 부산하다. 이제는 포카라로 향하는 마지막 트래킹이다

 

.

 

별 의미 없이 이어지는 일반적인 부락을 통과하는 마지막 일정에 트래커 몇 분이 불만을 드러내었다.

우리 일행 중에서는 히말라야 연봉 가까이 가 보고 싶어했는데 그게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카르포타를 떠난지 저녁 무렵 작은 소읍에 도착하였다.

여행사 가이드가 포카라로 이동할 봉고버스를 물색하는 동안 저녁을 먹고 시장 구경을 하였다.

자잘한 생활용품이며 간단한 먹거리 가게, 시장은 우리의 시골장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기념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수제 목걸이를 하나 샀다.

돌을 깎아 만든 것인 줄 알고 샀는데 조악스러운게 아무래도 프러스틱 제품을 잘못 산 것 같았다.

 

 

우리의 만두와 비슷한 먹거리를 만들어서 기름에 튀겨서 팔았다.

 

 

 

밤 늦게 포카라로 돌아오던 우리의 미니 버스와 마주 오던 대형 버스가 산록 도로 중간에서 정면 충돌하였다.

모두 피로에 지쳐서 졸고 있는데 갑작스런 비명 소리에 놀라서 눈을 뜨는 순간 강렬한 라이트와 함께 격한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다.

 

찌그러진 의자 사이에 끼였던 나는 일행들이 구출해 주었다.  내 앞자리에 앉았던 4명은 중상인 듯 하고 나는 앞 의자 턱에 얼굴을 박아서 입주위가 찢겨졌다. 혓바닥으로 치아를 훑어 보니 제자리에 박혀 있어 다행이라 여기면서 무릎에 큰 고통이 없는 듯하여 안심은 되었지만 사고의 충격으로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덜덜거렸다.

겁이 난 우리 버스 운전수는 어디로 도망가 버렸는지 사라져 버리고, 일행들이 간신히 잡은 트럭에 실려서 포카라 병원에 도착했다.

뼈에 금이 가서 움직이지 못하는 중상자들에 비하여 내 정도의 상처는 대수롭지 않았던지  “노 프라브럼!” 이라는 한 마디로 원 외 취급을 당했다. 하는 수 없이 알코올 묻은 솜을 찾아서 입 주위의 피를 닦고 이불 없는 침상에서 추위와 충격으로 덜덜 떨며 밤을 보냈.


사고 장소가 까마득한 계곡 중간이었다니 생각만하여도 끔찍하였다. 초파일 봉정사에 연등을 올린 정성이 갸륵하여 부처님이 보살피셨나 보다. 히말라야 어느 산 중턱에 산귀신이 될 뻔하지 않았나.

 

 "옴 마니 밧메 흠~! 


 

<옴마니 밧메 흠~!>

 

<1994. 1. 5.>

침낭도 없이 환자용 침대에서 공포와 추위로 덜덜 떨면서 포카라의 병원에서 마지막 밤을 새웠다.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이 퉁퉁 부었다.

사고를 당한 일행 중에 중상자가 많아서 결국 네팔 주재 한국영사관으로 연락을 하여 헬기가 온다고 한다

 

중상자들은 엠블런스에 실려서 공항에 도착을 하였다.

나는 그만한 걸 다행으로 여기고 손수건으로 부은 얼굴은 가리고 절뚝거리며 돌아 다녔다.

친구는 걱정스레 쳐다 보고 대기 중인 일행들의 표정도 다들 심각하다.

 

 

 

카투만두로 돌아온 우리는 병원으로 먼저 후송되었다.

움직일 수 있는 나는 주사 한대를 맞고 약을 받아서 숙소로 돌아오고 뼈에 금이 간 4명은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카투만두에서 하루를 묵은 후 시가지 관광을 나선다고 하기에 절뚝거리면서 일행을 따라 나섰다

 

 

 

<1994. 1. 6>

중상자는 병원에 누워 있는데도 퉁퉁 부은 일그러진 얼굴을 복면 강도처럼 손수건으로 가리고 마지막 시가지 관광에 따라 나섰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며 따라다니는 나를 보고 호텔에 누워 있지 않고 따라 나섰다고 친구가 개똥 나무래 듯 한다.

하지만 걸을 수 있는 한 사원 관광을 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우리 일행 중 일부는 몽키사원으로 가고 나와 친구는 박터풀사원, 파슈파티나트사원과 사원에 딸린 개방 화장터를 둘러 보았다.

 

파슈파티나트 사원에 딸린 화장장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이름 있는 관광지였다.

멀찍이서 살펴 보니 서양 관광객들이 주변 건물 위에 서 그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미 한 곳의 가트에는 장작을 쌓아 둔 위에 죽은자의 사체를 올려 놓고 화장을 하는 중이었다.

 

 

 

사체를 올려 놓는 곳은 가트라 하는데 신분이나 빈부의 차이에 따라 장작의 양이 달라서 제대로 화장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화장한 찌꺼기는 그대로 개천으로 쓸어 넣는데 그 곳 주변에서 돈벌이를 위하여 타다 만 장작을 주워 모으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계급 제도가 분명한 네팔에서 천민의 생활이 얼마나 궁핍한지 짐작이 되었다.

화장장 앞을 흐르는 개천은 매우 오염되어 있어서 개천이 아니라 시궁창 같았는데 그 곳에서 빨래를 하고 그릇을 씻는 모습도 보였다.  

 

 

 

 

파슈파티나트 사원이다.

순례객이나 수도승들의 방문이 잦은 곳으로 사원을 돌아보는 중에도 땅 바닥에 업드려 묵상 중인 수도승들이 흔하게 만날 수 있었다.

네팔 힌두교 최대의 성지로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파슈파티나트 사원의 건물과 함께 오른쪽에 붉은 화장터 건물이 살짝 보인다

 

 

 

박터풀 사원이다.

박터풀에는 세군데의 덜바 톨, 타우마티 톨, 타추팔 톨 세 군데의 광장이 있다. 광장의 주변에는 네팔에서 가장 높은나타폴라사원, 바이랍낫 사원이 있는데 나타폴라사원은 1702년에 지은 높이 30m 로 네팔에서 가장 높은 사원으로 유명하다. 이 곳은 현지인들에게는 중요한 광장으로  축제. 정치 집회 ,그 밖에 모임들이 벌어지는 곳이라 한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이다)

 

 

 

지금은 한국과광객들이 북적거린다고 하는데 20년 전의 그곳은 한국사람 비슷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직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네팔에서 담아 온 사진이 꽤 많았는데 그 사진 자료가 많이 없어졌다.

사진들이 사라진 연유를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지만 필름까지 없어졌으니 다시 인화할 수도 없다.

 

 

 

사원 안에는 곳곳에 풀무질을 하는 세공들이 무언가 작은 세공품을 만들고 있었다.

 

 

 

관광지는 다소 한산하였으며 관광객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장삿군의 모습은 초등학교 수학여행지에서 만났던 장삿군이나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중학생 또래 남자 아이가 코끼리상 조각품을 들고 사라고 하기에 값을 물어 봤더니만 계속 따라다니면서 사라고 보채었다.

사원을 둘러 보고 나오려고 할 때 다시 다가와서는 처음 부른 값의 1/3 정도라도 주면 팔겠다고 한다. 뼈를 깎은 것이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한다. 결국 기념품으로 코끼리상을 사 가지고 왔지만 그건 뼈로 만든게 아니라 틀에 찍어낸 생산품이었다.

 

 

 

 

8박 9일의 네팔 여행, 히말라야의 성스러움과 신비로움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비록 그 치맛자락 끝에서 머물다가 돌아왔지만 그 너른 품속에 며칠을 안길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싶다.

지금도 그 때의 상처가 남아서 아찔할 때가 있지만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은 곳이다.

 

사람마다 여행하는 방법과 여행지의 선호도가 다르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 속에 직접 부딪혀보는 여행을 좋아한다.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여행보다 고생스럽더라도 몸으로 부대껴 보는 여행이 체질적으로 더 맞는 모양이다.

요즈음은 히말라야 트래킹 후기를 많이 접할 수 있는 걸 보면 네팔 트래킹 인구가 많이 늘어난 것 같다

다녀온 글이나 사진을 보면 그 때 보다 관광객을 위한 시설도 많이 늘어나고 릿지를 이용하기 때문에 숙소도 편한 것 같다.

다시 한번 히말라야의 품에 안겨 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체력이 받쳐 줄 것 같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