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차푸차레!> 1993. 12. 31
베그나스 호수에서의 첫 야영 아침, 텐트에서 함께 동침을 한 친구, 또 한 사람의 동숙자와 나는
보온병에 받아 온 물로 얼굴을 씻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우와~~!!
난데 없는 굵직한 남자의 고함과 소란스러움에 놀라서 텐트 밖으로 뛰쳐나오니 호수의 안개를 헤치고 불쑷 솟아오른 하얀 설산.
까아~~!!! 마차푸차레다!
아침 햇살로 은빛으로 빛나고 있는 마차푸차레에 모두들 넋을 잃어버리고 카메라를 찾아들고 난리가 났다.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온 마차푸차레! 너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네팔인이 가장 신성시하여 절대로 오르지 않는다는 이 봉우리는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만년설을 이고 위엄있게 우리를 내려보고 있다. 사진으로만 대하던 마차푸차레를 직접 눈 앞에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하였다.
첫야영지를 떠나서 순도리단다로 출발, 언덕에 올라서 다시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고
구름이 없는 마차푸차레의 나신을 이리도 선명한 모습으로 바라보며 걸을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아서 또 걸음 멈추어 셔터를 누르고.
왼쪽 아래 뒤로 야영을 하던 베그나스 호수가 보인다.
첫 야영지를 떠난지 두어 시간 계속 오르기만 하던 길 끝에 고개에 올라 섰다.
가이드 말로는 해발 3000 가까이 된단다. 높은 곳에서 본 히말라야 연봉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가운데 뾰족한 마차푸차레, 그 왼쪽이 안나푸르나 남봉 다시 그 왼쪽이 람중히말이다.
오르락 내리락 고개를 넘고 마을을 지나면서 히말라야의 모습에 매료되어 자꾸만 걸음이 지체된다.
안 그래도 걷는 속도가 느린 나는 일행들과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해발 고도가 높지만 습하지 않은 맑은 날씨는 외투를 벗어야 할만큼 땀이 났다.
한국의 겨울에는 이 곳은 건기라서 비를 만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덕분에 무덥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날씨는 상쾌하였다.
고지가 낮은 곳에서 보이던 열대지방의 꽃과 나무들이 고도가 높아지면서 보이지 않고 산은 겨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도가 높아지자 일행 중 몇사람이 어지럽고 구토가 난다고 고산증을 호소하였다. 오늘 야영하는 지사파니힐은 해발고도 3400m 라고 한다
아마 순도리단다에서 저심 식사를 해결 한 것 같다.
헌데 순도리단다는 그냥 통과하는 중간 지점이라 크게 기억이 나는 것이 없다.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는 랑탕 히말, 쿰부 히말 등의 여러 코스가 있는데 우리가 걸은 코스는 그 중에서도 외곽의 쉬운 코스였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일행 중 모 지방 신문 기자와 의사 샘, 두 분은 이 코스에 만족하지 못하고 일정을 더 늘여서 랑탕으로 간다고 카투만두에서 남았다. 종일 걸으면서 산록의 마을을 지나고 오르락 내래락 하는 길이 힘든 곳도 많았지만 아주 무난하게 걸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잠시 목을 축이러 구멍 가게에 들르니 아이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신기하게 쳐다본다. 어린 시절 코쟁이 미국 사람들을 신기해하며 따라다니던 생각이 났다. 뒤쳐져 함께 가던 네명이 가게의 맥주를 거덜내어 버리니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저녁 무렵 다른 일행들보다 조금 늦게 야영지에 도착하였다.
<원주민들과 함께 한 1993년 망년회>
저녁 무렵 두번 째 야영지인 지사파니힐에 도착하였다.
걷이가 끝난 마을 근처의 야영지에 짐을 풀고, 포터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일행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았다.
붉은 흙벽으로 쌓아올린 십여 호의 집들이 띄엄 띄엄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은 조용하다.
간혹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돌담 뒤에서 얼쩡거린다.
여러 마을을 지나면서 집집마다 원뿔 모양의 대바구니가 마당 한쪽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용도에 대하여 모두들 한 마디씩 아는 체를 했다. 그 중에 병아리를 키우는 데 쓸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그럴 듯하여 거기에 동조를 하였더니, 원뿔 모양의 대바구니는 지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그들의 필수품이었다.
둥근 아랫부분을 가로질러 끈을 매어 놓았는데, 짐을 가득 담은 대바구니를 거꾸로 등에 업고 긴 끈을 이마에 걸치면 멋진 지게가 되었다.
우리의 짐을 나르던 포터 중 한 명은 어린 아이 키 정도 밖에 크지 않았는데 고깔 모양의 바구니에 자기 키 만큼의 짐을 옮기고 있었다.
마을 한쪽 널찍한 논에 청년들이 공을 차느라 분주하다. 요령 있게 공을 다루어서 용케도 산 아래로 굴러 내리지 않는다.
한쪽에는 옛날 시골의 학예회처럼 천으로 커텐을 만들어 놓고, 포인세티아 꽃잎을 엮은 긴 줄을 운동회 만국기 줄처럼 이리 저리 쳐 놓은 것을 보니 축제가 있을 법하다.
대부분 판쵸를 하나씩 두르고 있다. 산악 지대라서 담요처럼 생긴 판쵸는 추위를 이기기 위한 그들의 평상복이다.
무대도 만들어 놓고 마을 유지들은 운동회 때 교장선생님처럼 커다란 종이꽃을 가슴에 달고 목에 힘주고 있었다.
우리는 서툰 영어와 몸짓으로 마을 사람들과 어울렸다. 네팔에서는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교과목으로 정하여 의사소통이 원활하다.
우리의 영어가 오히려 더 서툴었다.
젊은이들은 우리 일행에게 한국으로 초청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주소를 적어 주었다. 그들에게 한국은 황금의 나라로 알려진 것 같았다.
실제로 우리 일행의 가이드 중에는 스무살 남짓한 예쁘장한 청년이 여행사와 계약하여 한국과 네팔을 오가며 안내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마을 청년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단다.
막걸리 같은 뿌연 술잔이 오가고 쟁반에 담은 풀기 없는 밥을 손으로 집어 먹으면서 마을 사람들과 조금씩 가까워 지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자 남포불과 랜턴으로 불을 밝혀 놓고, 마을 사람들은 기대어린 시선으로 축제장 앞에 모였다.
커텐이 열리면 그들의 노래와 춤이 시작되고, 고운 전통 옷을 차려 입은 아가씨는 포인세티아 만국기 아래서 간드러지게 춤을 추었다.
1993년의 마지막 밤, 그들은 그렇게 한 해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가슴에 커다란 종이 꽃을 꽂은 마을 촌장과 어른들의 위엄 있는 표정 뒤로 저 멀리 안나푸르나의 자태가 달빛에 신비스럽게 빛을 발하고.
우리도 아리랑 가락과 어깨춤으로 그들과 함께 마지막 밤을 멋드러지게 보냈다.
야영지에 돌아 온 우리는 그 기분을 그대로 삭이기 아까워 오만가지 민요를 부르며 포터들과 어울려 애국심(?)을 발휘하였다.
괜히 집에 대한 향수로 술잔과 모닥불을 벗하며 밤을 새웠다.
보름에 가까운 밤, 달빛에 빛나는 히말라야 연봉과 쏟아져 내릴 듯한 별빛에 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낮의 기온차가 심하고 물이 부족한 고원이지만 멀리 거대한 설산을 보면서 살고 있는 그들은 얼마나 순수할까?
야영지의 밤, 달빛에 빛나는 설산이 이마에 닿을 때,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충동으로 가슴은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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