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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발길 따라

감은사지와 감포 바다 대왕암

by 여왕벌. 2009. 11. 29.

2009. 11. 18. 연수 중에

 

 감은사지 3층석탑, 참 오랜만이다. 왼쪽으로 터진 동해를 끼고 너른 들을 내려다 보고 자리 잡은 감은사 터. 사찰은 소실된지 오래 되었고 2개의 3층 석탑만이 웅장한 위용을 뿜어내고 있다. 십여 년 전 준비하던 시험에 낙방하고 경주에서 동해안으로 한 바퀴 기분 전환을 위한 여행을 할 때 감은사지에 잠시 들러 우람한 석탑에 넋을 잃었던 기억이 새롭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단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즉위 이듬 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석탑은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모습으로 동해를 지키고 서 있는 모양이다.

 

신라의 석탑은 그 오랜 시간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 품고 묵묵히 견뎌 왔을까? 천삼백 여 년을 더 거슬러 살았던 그네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두 손을 모으고 탑돌이를 하였을까? 무심한 시간은 발치에 햇살로 와 닿는데, 탑은 과거의 이야기를 품은 채 말 없이 초겨울 바람을 맞고 있다.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쪽으로 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절터 옆에는 잔디를 이식하느라 연로한 아낙들이 따신 겨울 햇살을 다행스러워하면서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부왕의 유해를 동해 바다에 수장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장소가 바로 대왕암 이 바위다. 몇 해 전에 이 곳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석관 두껑 같은 돌이 발견되긴 했는데 발굴은 하지 않았단다. 혹시나 발굴되었을 때 아무 것도 확인되지 않는다면 전해지는 그 이야기가 빛이 바래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전해지는 그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싶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대왕암까지 관광객을 태운 보트가 한두 차례 내왕했던 모양인데, 지금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