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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나누기/발길 따라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카투만두=>포카라=>히말라야=>포카라=>카투만두)

by 여왕벌. 2009. 10. 30.

 1993. 12월~1994. 1월.  네팔 카투만두=>포카라=>히말라야 산록트레킹

 

벅찬 기대를 안고 수도 카투만두 상공에서 시가지를 내려다 본 첫 느낌, '붉다!' 는 것이었다.

그 느낌에 대한 의문은 산록을 트레킹 하는 동안 풀리게 되었다.

산지를 형성하고 있는 토질이 붉은 색이라서 건물의 벽이 붉으니 붉은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멀리 히말라야를 조망하며, 뾰족한 마차푸차레, 머리 뒤에 살짝 가려진 안나푸르나 남봉 1994년 1월 >

 


네팔은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힌두 왕국이란다. 관공서나 호텔, 식당에는 왕과 왕비의 사진이 걸려 있다.

마치 예전 우리네 학교 교무실에 대통령 사진 걸어놓듯이.  

봉고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호텔 밖에 걸어 놓은 붉은 환영 현수막을 보고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트레킹 하러 오신 손님께서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한국 여행객을 주 고객으로 하고 있기에 고객을 기분을 맞추려는 호텔측의 상술이겠지만

어법에 맞지 않는 서툰 글씨라도 그 정성이 애교스러웠다.


짐을 옮겨주며 방까지 안내를 하던 호텔 종업원은 내 목에 걸고 있던 하회탈 목걸이에 자꾸만 눈길을 주었다.

1500원짜리 목걸이라 부담도 없고 기념도 될 것 같아서 선뜻 건네주자 종업원은 깊숙이 허리 숙이며 만족스런 얼굴로 돌아갔다.


.


 

카투만두는 수도이지만 포장이 안된 거리에 악취가 많이 났다.

담구석에 쭈구리고 앉아서 방뇨를 하고 있는 남자가 사진의 배경에 찍히기도 할 정도로 거리는 어지러웠다.

 

포장이 덜 된 카투만두 시가지는 매연과 먼지로 부옇게 흐렸고,

신호등이 드문 거리에는 교통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곳곳이 지저분한 오물로 악취를 풍겼지만 관공서나 힌두 사원이 그나마 수도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인도의 거리보다 안정되고 깨끗하다고 하니 그저 그런가 보다 할 수 밖에.

 

카투만두 거리에서 땅콩파는 소년은 참 귀여웠다.

책과 관광상품을 파는 가게 앞에서 무료하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소년과 함께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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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대로 깨끗한 숙소에서 1박 후, 25인승 경비행기로 히말라야 계곡 사이를 곡예를 하듯 30여 분을 날았다.

히말라야를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

카투만두에서 서쪽으로 200㎞떨어져 있는 호반의 도시 포카라는 그저 작고 한적한 도시였으나

산악인들을 태운 비행기로 안동 버스 터미널 정도의 작은 공항 대합실이 언제나 북적거린단다.


예약된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하여 오전 내내 조바심하며 짜증스러웠던 기분은

스치듯이 지나가는 나무 숲과 부딪칠 것 다가오는 산 옆구리, 붉은 계단식 논과 드문드문 보이는 부락의 아름다움,

만년설이 녹아 계곡 사이를 실같이 흐르는 강 줄기, 멀리 조망되는 히말라야 연봉들의 감격으로 말끔히 보상되었다

 


 

 고지 3,400m의 산지에는 군데 군데 마을이 있었다. 산록의 그들은 꽃을 좋아하였다.

복숭아나무 만한 포인세티아로 울타리를 꾸몄고, 집 뜰에 심겨 있는 맨드라미와 메리골드, 백일홍 같은 꽃들은

우리의 시골집을 연상시켜 주었다. 꽃을 보고 반가워하는 내게 인상 좋은 주인이 꺾어 준 노란 메리골드 향기는 종일 나를 흐뭇하게 하였다


 트레킹 중간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놀이에 참여하다.

당구대 같이 생긴 대위에서 매끄럽게 다듬은 돌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네 귀퉁이의 구멍 속에 집어넣는 놀이다.

도중 함께 거들어보았는데 생각 보다 어려웠다. 너무 매끄럽게 대가 잘 다듬어져 있어서 아무래도 손으로 깎은 것일까?

의심스러웠지만 마을 사람들이 함께 놀이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첫 야영지인 페와 호숫가의 아침, 안개를 헤치고 불쑥 솟아오르는 마차푸차레의 출현에

우리는 까무러치듯이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었다.

호수 건너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온 마차푸차레! 너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네팔인이 가장 신성시하여 절대로 오르지 않는다는 이 봉우리는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만년설을 이고 위엄있게 우리를 내려보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대하던 마차푸차레를 직접 눈앞에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하다.

 

 


 

마차푸차레의 감격을 뒤로 하고 역대 네팔 왕들의 사냥 길을 따라 온 종일 걸었다.

잠시 목을 축이러 구멍 가게에 들르니 아이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신기하게 쳐다본다.

어린 시절 코쟁이 미국 사람들을 신기해 하며 따라다니던 생각이 났다.

원주민 아이들에게 우리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구경거리가 되었다.

 

 계곡의 오지 아이들은 맨발에 판쵸 조각을 두르기도 했는데,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 볼펜을 달라고 따라다니는 통에 참 난처했다.

가이드는 주지 말랜다. 아이들이 그런것을 얻어서 쓰려는 것이 아니라 팔아버린단다. 속눈썹이 엄청 길고 눈이 큰 이이들은 참 예뻤다.

 

 넷이서 가게의 맥주를 거덜 내 버리니 얼굴이 홍당무다. 저녁 무렵 일행보다 조금 늦게 야영지에 도착했다.

 

 

<네팔 히말라야 산록의 한 마을 축제에서>

 

 

걷이가 끝난 마을 근처의 야영지에 짐을 풀고, 포터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일행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았다.

붉은 흙벽으로 쌓아올린 십여 호의 집들이 띄엄 띄엄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은 조용하다.

간혹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돌담 뒤에서 얼쩡거린다.


마을 한쪽 널찍한 논에 청년들이 공을 차느라 분주하다. 요령 있게 공을 다루어서 용케도 산 아래로 굴러 내리지 않는다.

한쪽에는 옛날 시골의 학예회처럼 천으로 커텐을 만들어 놓고,

포인세티아 꽃잎을 엮은 긴 줄을 운동회 만국기 줄처럼 이리 저리 쳐 놓은 것을 보니 축제가 있을 법하다.  

무대도 만들어 놓고 마을 유지들은 운동회 때 교장선생님처럼 커다란 종이꽃을 가슴에 달고 목에 힘주고 있었다.


우리는 서툰 영어와 몸짓으로 마을 사람들과 어울렸다.

네팔에서는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교과목으로 정하여 의사소통이 원활하다. 우리의 영어가 오히려 더 서툴다.


막걸리 같은 뿌연 술잔이 오가고, 쟁반에 담은 풀기 없는 식사를 손으로 집어먹으면서 사람들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우리 일행에게 한국으로 초청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들에게 한국이 황금의 나라로 알려진 것 같았다.

실제로 우리 일행의 가이드 중에는 스무살 남짓한 예쁘장한 청년이 여행사와 계약하여 한국과 네팔을 오가며 안내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마을 청년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단다


어둠이 내리자 남포불과 랜턴으로 불을 밝혀 놓고, 마을 사람들은 기대어린 시선으로 축제장 앞에 모였다.

모두들 판쵸를 하나씩 두르고 있다. 산악 지대라서 담요처럼 생긴 판쵸는 추위를 이기기 위한 그들의 평상복이다.


커텐이 열리면 그들의 노래와 춤이 시작되고, 고운 전통 옷을 차려 입은 아가씨는 포인세티아 만국기 아래서 간드러지게 춤을 추었다.


1993년의 마지막 밤, 그들은 그렇게 망년회를 하고 있었다.

가슴에 커다란 꽃을 꽂은 마을 촌장과 어른들의 위엄 있는 표정 뒤로 저 멀리 안나푸르나의 자태가 달빛에 신비스럽게 빛을 발하고.

우리도 아리랑 가락과 어깨춤으로 그들과 함께 마지막 밤을 멋드러지게 보냈다.


야영지에 돌아 온 우리는 그 기분을 그대로 삭이기 아까워 오만가지 민요를 부르며 애국심(?)을 발휘하였다.

괜히 집에 대한 향수로 술잔과 모닥불을 벗하며 밤을 새웠다.

 

밤낮의 기온차가 심하고 물이 부족한 고원이지만 멀리 거대한 설산을 보면서 살고 있는 그들은 얼마나 순수할까?

야영지의 밤, 달빛에 빛나는 설산이 이마에 닿을 때,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충동으로 가슴은 벅찼다.  

   8박 9일 동안 마을을 찾아 하루 종일 걷고 야영으로 숙식을 해결하였다.  

 

*************************************************중략


닷새째 마지막 야영을 하면서 붉으스름한 강물에 아쉬운 대로 땀 냄새를 씻을 수 있었다.

만년설이 녹은 물이라 꽤 차가웠지만 근질거리는 머리를 감을 수 있다는 후련함으로 추위를 감수할 수밖에.


   마지막 트레킹을 마치고 포카라로 이동하는 중 우리 일행의 봉고버스와 대형 버스가 산악 도로에서 정면 충돌, 4명의 중상자.

   나도 찌그러진 의자 사이에서 간신히 구출되었다. 앞 의자에 입 부분을 그대로 부딪혀서 입술 아래가 찢어지고 이빨이 흔들흔들,

   다리를 움직이기 힘들 정도에 사고의 충격으로 충격으로 전신이 덜덜덜....

 

   대장이 돈을 흔들어 간신히 잡은 트럭에 실려서 포카라 병원에 도착했지만

   구멍 가게 같은 포카라 병원에서 내 부상 정도는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no problem! 한마디.

   하는 수 없이 알코올 묻은 솜을 찾아서 입 주위의 피를 닦고 이불 없는 침상에서 추위와 충격으로 덜덜 떨며 밤을 보냈다.


사고 장소가 까마득한 계곡 중간이었다니 생각만하여도 끔찍하였다.

초파일 봉정사에 연등을 올린 정성이 갸륵하여 부처님이 보살피셨나 보다. 히말라야 어느 산 중턱에 산귀신이 될 뻔하지 않았나.


“옴 마니 밧매 훔!”


이튿날 오후 네팔 주재 한국 영사관까지 동원되고서야 특별 헬기를 타고 카투만두로 이송되었다.

그 몇 시간 동안 여러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에 실망도 컸지만 진정으

로 걱정하고 살펴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하기도 했다.

 


<사원 근처의 화장장. 시신이 불타는 연기>

 

 

   중상자는 병원에 누워 있는데도 사고로 일그러진 얼굴을 복면 강도처럼 손수건으로 가리고 마지막 시가지 관광에 따라 나섰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며 따라다니는 나를 보고 친구가 개똥 나무래듯 한다.


카투만두 동쪽에 있는 파슈파티나트 힌두 사원바닥에 엎드려 묵상을 하고 있는 순례자는 무심의 지혜를 생각하게 하였다.

사원 이웃의 개방된 강변 화장터에는 방금 도착한 시신이 장작더미 위에서 연기를 내고 있었다.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시신을 태우는 장작의 양이 다르다는데

돈이 부족하여 장작을 넉넉하게 사지 못한 덜 태워진 시신은 그대로 개천 물에 버려진단다.


그 개천에 세수도하고 그릇도 씻고 한단다.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 나와 외국 관광객들의 삶이나 죽은 자의 삶이나 그 끝은 모두 똑같은 것을.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게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시신을 뒤적이는 모습을 보니 산중에서의 사고가 다시 떠오르며 몸서리쳐졌다.

 


 

<사고 후 카투만두의 파슈파니냐트 사원 관광 중에>

 


힌두 사원의 벽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졌고, 지붕은 우리의 기와 구조와 비슷하였다.

네팔과 한국의 비슷한 지붕의 구조를 어떻게 관계지어야 할지 ....

아마도 불교 문화가 전해지면서 공통점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짐작해 본다.

 

************************************* 중략 

 

 8박 9일의 네팔 여행, 히말라야의 성스러움과 신비로움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비록 그 치맛자락 끝에서 머물다가 돌아왔지만 그 너른 품속에 며칠을 안길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싶다.

지금도 그 때의 상처가 남아서 아찔할 때가 있지만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이다.

 

그리운 네팔. 안나푸르나의 설산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