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20. 강진.
담양에서 정자 문화 기행을 하고 점심 식사 후 일행들과 작별을 하였다.
2시가 한참 넘은 시각이라 완도까지 가려면 빨리 서둘러야 한다.
겨울 해가 좀 길어지긴 했지만 그리 익숙하지 않은 길이라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전에 숙소를 잡아야 하니까.
길을 떠날 때는 네비의 도움을 받지만 항상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미리 지도를 익혀 두는 습관이 있다.
담양에서 완도까지의 길을 미리 체크해 두지 못하여 조금은 불안하지만
네비 아줌마가 엉뚱한 곳으로 델꼬 가지는 않겠지 싶어 그래도 미더운 구석이 있다.
헌데 중간 중간 최근에 개통된 길이 있어서 아줌마가 자꾸만 헤멘다. 빨리 네비 아줌마를 업그레이드를 해야 겠다.
출발한지 두 시간 안 되어 강진까지 달릴 수 있었다.
완도로 바로 갈려다가 4km 남짓 옆길로 새면 다산초당을 볼 수가 있다는 이정표에 잠시 방향을 바꾸었다.
몇 번 지나치면서도 꽃을 더 보려는 욕심 때문에 문화 유적지는 그냥 통과만 했던 터라 꽃이 없는 겨울에는 문화 탐방이 제격이다
헌데 나는 여태껏 왜 정약용의 다산초당을 고산 윤선도의 초당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산>과 <고산> 의 호가 비슷해서 그런가?
4시 가까운 시각에 초당 아래 마을에 도착을 하였다. 몇 호 되지 않은 작은 마을은 관광 비수기라서 그런지 조용하기만 하다
쇠고비 종류와 봉의꼬리가 어우러진 돌담이 이쁘다.
초당으로 오르는 입구에 있던 건물인데 이름을 확인하지 못하여였다.
큰개불알풀 꽃이 파란 접시에 안테나를 올려서 찌뿌둥한 하늘과 무선 교신을 하고 있다. 역시 남쪽이다
고사리 한 종류도 담긴 했는데 이름은 나중에 찾아야겠다. 흐린 날씨에 어두운 숲이라 셔터 속도가 안 나온다.
물도랑 옆 고사목 둥치에 마삭줄과 어우러진 개구리발톱 잎이 싱싱하다.
이 녀석을 처음 보는 위쪽 사람들은 꿩의바람이나 매발톱꽃 잎 쯤으로 오인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시간이 바쁘지 않다면 느적느적 여유 있게 소요하고픈 이쁜 산길이다.
주변에는 굴참나무와 소나무, 동백나무, 삼나무, 사스레피나무 등의 상록수종과 조림이 된 황칠나무가 많이 보였다.
초당으로 오르는 오솔길과 주변의 숲에는 황칠나무를 조림해 놓아서 푸른 잎이 여름인 듯 착각이 들게 한다.
이 곳 부터 초당 바로 아래까지 이어지는 뿌리의 길이 시작된다.
소나무와 삼나무 뿌리가 드러나서 계단처럼 만들어 주고 있었는데 나무 뿌리가 흙이 유실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단단한 뿌리를 밟으면서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오솔길 좌우 숲에는 삼나무가 우점하고 있다.
한참 오르니 초당이 보인다. 동백나무 숲으로 둘러 싸인 초당이 정갈해 보인다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집필하던 곳으로 원래 초가집이 었는데 기와집으로 복원을 해 놓았다.
겨울 늦은 오후 시각의 초당은 간간이 찾는 이가 있을 뿐 다산의 숨소리조차 들릴 듯 고요하고 적막하다.
마루에 놓여 있는 방명록에 이쁜 여자 아이가 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초당 안에는 다산의 초상이 모셔져 있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던 다산은 학문을 받아들임에 있어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생각을 가지고
청나라를 통해서 들어오는 서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인 매우 진보적이 실학자이다
그 시절 다산을 포함한 실학자들 덕분에 덕분에 충, 효, 예의 인간의 도리를 강조하던 유학 중심에서 탈피하여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킬 수가 있었다
초당 마당에 박혀 있는 편평한 반석은 다조라고 하며 차를 달이던 부뚜막이란다.
다조는 다산이 여기 오기 전 부터 있었다는데 초당 왼쪽에 있는 약천 샘물을 떠다가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서 차를 달였다고 한다.
약천은 초당 2경, 다조는 초당 3경이라고 한다
초당 오름쪽 옆에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아서 작은 연못을 만들어 두었다.
연못 가운데 바닷가의 돌을 쌓아서 산모양을 만들고 석가산이라 칭하였다는데 이 연못을 연지석가산이라 불렀다.
다산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자연의 환경을 이용한 관조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다산초당의 동쪽에 있는 동암이다.
이 곳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실학 저서 집필에 몰두하고 손님을 맞이하던 곳이라 한다.
다산 정약용은 정치, 경제, 역사, 어문학, 지리, 과학, 예술, 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역사상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우리 나라의 과학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외웠던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은 다산의 대표적인 저술서이다.
농사와 공사에 이용할 수 있는 여러 도구도 많이 발명을 하여 도움을 주었다는데
도르레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만들어서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도 한다.
동암에는 2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보정산방 현판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으로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고 있는 산방이란 뜻이란다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동쪽으로 몇 발짝을 더 옮기니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강진 앞바다가 굽어 보이는 곳에 천일각이 세워져 있다.
이 누각은 다산 유배 시절에는 없었던 건물인데 다산이 매일 이곳에서 강진 앞 바다를 내려다 보면서
정조대왕과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는 형님을 그리워 하지 않았을까 하여 강진군에서 세웠다고 한다.
이 곳에서 백련사 까지 약 800m 의 숲길 주변에 동백나무와 야생의 차나무 군락이 있다는 설명이 구미를 끈다.
다산이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담소를 나누기 위해 다니던 오솔길이라 하는데 백련사 까지는 갈 시간이 안 되지만
차나무가 보고 싶어서 길을 따라 올라가 본다. 오솔길 좌우에 잎 넓은 작은 관목이 숲 바닥을 채우고 있다.
아코야~! 욘석이 차나무 였구나!
산 초입에서 이 녀석을 보고 상산나무 잎과 무척 닮았는데 뭘까? 하고 갸웃거렸던 녀석이다.
아직 차나무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었는데 녀석이 바로 차나무였던 것을 몰랐다.
다산이 차를 즐겼던 이유가 바로 초당 주변 숲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차나무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혹시나 잘못 볼 수 있다 싶어서 열매를 찾으니 열매가 갈라져서 종자가 빠진 껍질이 달려 있다. 차나무가 확실하다.
유후~! 녹차밭에서 재배하는 녀석이 아니라 자생의 차나무를 만나다니 덤으로 얻는 소득에 기분이 좋다.
아직 벌어지지 않는 몇 알의 열매도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
가지 끝에 쌀알만한 햇열매가 달려 있다. 내년 이맘 때 쯤이면 익어서 열매가 벌어질 것이다.
아쉽게도 꽃을 만나지 못하였다. 11월 쯤 왔더라면 야생의 차 꽃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벌써 다섯 시가 넘었다. 완도 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라 어둡지 않게 도착이 되겠다.
백련사는 나중 기회에 들러야겠다. 애기동백이 유명하다는 미황사에도 들러 보라고 정보를 주던데...
동백숲의 꽃봉오리 상태로 봐서는 아직 개화가 이르지 싶다. 미황사도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