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11. 제주 서귀포.
제주에 도착한 날 서귀포에서 점심 식사를 하다가 우연하게 발길 닿은 곳 이중섭 거리.
부두 노동자로 전전하면서도 그릴 것만 있으면 그 독특한 선형의 해학적인 그림을 그려대던 이중섭은
그림의 열정을 제대로 꽃 피우지도 못하고 4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천재 화가이다.
마치 금방이라도 화면 밖으로 달려 나갈 것만 같은 이중섭의 소 그림은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지만
꽃, 게와 물고기, 아이들을 즐겨 그린 그 작품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일본으로 보낸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는 작품이 많지 않은 비운의 화가로 알려져 있고 선화풍의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편안함과 해학적은 느낌을 준다
북한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1937년 일본으로 건너 가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1943년 귀국하여 원산에서 일본인 후배와 결혼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겨울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부산·서귀포·통영 등지로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했다고 한다.
그 때 이 곳 서귀포에 잠시 머물렀던 모양이다. 그 흔적을 놓지지 않고 관광지로 개발한 행정가들의 센스가 대단하다.
그가 머물렀던 집도 관광지로 만들어 정비를 해 두었다. 오늘 내 전속 모델인 동생이 그림의 배경이 되어 준다.
1952년 국제연합(UN)군 부대 부두노동을 하며 양담배갑을 모아 은지화를 제작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이듬해 부인을 만나러 일본에 1차례 건너갔다 온 것을 제외하고는 만나지 못했다.
궁핍과 고독의 나날을 보내면서 이중섭은 정신이상 증세와 불규칙한 생활로 병세가 악화되어 40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거리의 보도에는 이중섭의 그림을 화산석에 판각하여 바닥에 깔아 두었고 가로등에도 그의 그림을 판넬로 제작하여 설치해 두고 있다.
마당 한켠 어린 매화나무에 꽃눈이 터지고 있다.
골목 건너 돌담 옆 매화나무에도 꽃향기가 화사하다.
매화나무 아래 파르라니 큰개불알풀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가족을 그리는 이중섭의 그리움일까?
골목 돌담에 왕모람도 무에 궁거운 일이 있는지 따사로운 볕에 팔을 벌리고 가지끈 고개를 늘였다.
이중섭의 기침소리가 베인 곳 마당가 작은 꽃밭에 금잔옥대 수선화가 꽃잎을 펼쳤다.
하얀 꽃잎과 꽃받침이 옥접시로, 노란 부화관이 황금술잔의 형상을 했대서 금잔옥대라 불리워지는 녀석이다.
어릴 적 내 고향에서 보던 극장 건물이 눈에 띄길래 반가워서 담는데 우째 좀 이상타!
ㅎㅎ... 이 건물도 관광용으로 꾸며 놓은 추억의 극장이었던 거다.
이중섭 미술관에는 그와 관련된 그림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겠지만 출발하자는 호출에 발길을 돌린다.
미술관 앞에 높다란 하귤나무가 주먹만한 귤을 달고 발길 돌리는 게 아쉽다고 내려다 본다.